모든 것이 잉글랜드에 불리해 보였다. 역대 월드컵 승부차기 전패의 잉글랜드는 이번에도 승부차기에 몰렸다. 몇 분만 버티면 연장이나 승부차기 없이 이길 상황에서 동점골을 내준 것. 과거의 통계와 심리적인 측면에서 모두 잉글랜드는 뒤지고 들어갔다. 그러나 40대의 젊은 감독 개러스 사우스게이트(48)가 이끄는 평균나이 26세의 패기 넘치는 ‘삼사자 군단’은 굴하지 않았다. 지난 1990년 서독(현 독일)전부터 이어진 역대 월드컵 승부차기 3전 전패의 ‘저주’를 28년 만에 보란 듯이 깨부쉈다. 러시안룰렛이라 불리는 승부차기에 맺힌 한을 러시아에서 풀어낸 것이다.
4일(이하 한국시간) 모스크바 스파르타크 스타디움에서 콜롬비아와 120분간 1대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대3으로 이긴 ‘축구 종가’ 잉글랜드는 오는 7일 오후11시 스웨덴과 2018러시아월드컵 8강전을 치른다. 조별리그에서 한국을 1대0으로 눌렀던 스웨덴은 스위스와 치른 16강에서도 1대0으로 이겼다. 후반 21분 에이스 에밀 포르스베리가 결승골을 터뜨려 팀을 24년 만에 8강에 올려놓았다. 슈팅을 30개(스웨덴 12개·스위스 18개)나 주고받았으나 단 1골만 나왔다. 스웨덴은 이번 대회 4경기 중 3경기를 무실점으로 마치며 끈끈한 수비를 자랑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잉글랜드는 4경기 9골의 뜨거운 화력이 자랑이다.
잉글랜드가 막차를 잡아타면서 이날로 러시아월드컵 8강이 확정됐다. 유럽 6개국과 남미 2개국이 살아남은 가운데 유럽의 4회 연속 우승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유럽·남미 외 국가가 8강에 한 팀도 오르지 못한 것은 12년 만. 6일 오후11시 우루과이-프랑스전을 시작으로 4강 티켓 전쟁이 펼쳐진다.
전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로 짜인 잉글랜드는 12년 만에 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 메이저대회(월드컵·유럽선수권) 녹아웃 스테이지 승리도 2006년 이후 처음이다. 잉글랜드는 그동안 월드컵뿐 아니라 유럽선수권에서도 승부차기 악몽에 시달려왔다. 역대 일곱 차례 승부차기 전적이 1승6패. 자국에서 열렸던 유로1996 8강에서 스페인을 꺾은 게 전부였다. 메이저 원정 승부차기 승리는 이번이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초다.
후반 12분 해리 케인(토트넘)의 페널티킥 득점으로 앞서 간 잉글랜드는 후반 추가시간 코너킥 때 예리 미나에게 헤딩 동점골을 맞았다. 추가시간 5분이 주어진 상황에서 92분33초에 나온 뼈아픈 실점이었다.
연장을 소득 없이 마치고 들어간 승부차기. 골키퍼 조던 픽퍼드(에버턴)의 왼손이 잉글랜드를 구했다. 다섯 번째 키커 카를로스 바카의 강슛을 왼손으로 걷어낸 것. 이후 에릭 다이어의 마무리 골로 잉글랜드는 승부차기 저주와의 작별을 알렸다. 앞서 조던 헨더슨의 슈팅이 콜롬비아 다비드 오스피나에게 걸리면서 2대3으로 벼랑에 몰렸으나 콜롬비아의 네 번째 키커 마테우스 우리베가 크로스바를 맞히는 행운이 잉글랜드에 따르기도 했다.
스타 플레이어 조 하트를 밀어내고 월드컵 무대를 밟은 스물네 살 픽퍼드는 지난 시즌 에버턴에 정착하기 전까지 무려 6개 팀을 돌며 임대생활을 한 ‘떠돌이’였다. 대표팀 발탁도 지난해가 처음이었고 콜롬비아전이 A매치 8경기째다. 당연히 경험 부족이 아킬레스건으로 꼽혔으나 결과적으로 기우였다. 이번 대회 4경기 모두 장갑을 낀 픽퍼드는 “페널티킥에 자신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잉글랜드 골키퍼가 메이저대회 승부차기에서 상대 슈팅을 막은 것은 1998월드컵 아르헨티나전의 데이비드 시먼 이후 20년 만에 처음이다.
잉글랜드 대표팀 사상 최연소 주장인 케인은 이번 대회 6골로 2위 그룹을 2골 차로 따돌렸다. 득점왕뿐 아니라 월드컵 단일 대회 최다골(8골·2002년 브라질 호나우두) 경신에도 한발 더 다가선 것이다. 승부차기에서도 1번 키커로 나서 믿음직하게 골망을 가른 케인은 캡틴으로 뛴 8경기에서 빠짐없이 득점(12골)하고 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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