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9일 내놓은 ‘감독혁신과제’는 금융회사에 대한 감독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게 핵심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감독규제 완화를 추진했다면 정반대로 방향을 튼 것이다. 윤 원장이 “(감독규제 완화를 앞세운 전 정권과 달리) 앞으로 감독을 강화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 것도 감독 완화보다는 강화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금융소비자 보호라는 명분만 놓고 보면 윤 원장이 제시한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은행은 물론 보험사나 증권사 등의 불완전 판매로 피해를 본 소비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특히 시장이 포화한 보험 업계의 경쟁이 과열되면서 보험사들의 불완전 판매 우려도 점점 커지고 있다. 하지만 금융사들이 느끼는 현실과 금감원이 보는 시각과의 괴리가 큰 게 문제다.
단적인 예로 금리 과다산정 적발과 관련해 금감원은 은행들이 조직적으로 금리를 조작했다는 입장에 가깝지만 시중은행은 금리 조작을 통해 얻은 실익에 비해 처벌 위험성이 너무 큰데 누가 간 크게 조작에 나서겠느냐며 맞서고 있어 서로 입장이 상충하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개별 창구에서 벌어진 직원의 실수”라고 밝혔지만 금감원은 여전히 전면적인 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며 전 은행을 대상으로 부당 대출금리 부과 실태를 검사하겠다고 나섰다. 이 같은 간극이 커질 경우 금감원과 시중은행은 진실공방에 매몰돼야 하고 양측 모두 소모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 금융권 입장에서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지배구조 논란에 이어 또다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 보호에 치우쳐 금융 산업 발전이 뒤로 밀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민간 금융회사에도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을 강제하겠다는 구상은 지난해부터 나왔지만 최 위원장조차도 “사회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며 사실상 도입을 반대했다. 윤 원장은 이날 “최 위원장의 지적에 충분히 공감하고 빨리 도입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공청회를 한다든지, 소통 채널을 많이 열어 여러 이슈를 논의해나가면서 추이를 보자”고 말했다.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을 위한 공론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앞두고 금감원이 유리한 여론 조성을 위해 민감한 이슈를 제기해 선제공격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금융회사에 대한 정기 종합검사 부활도 논란거리다. 지난 정부 때 폐지할 정도로 문제가 많이 지적됐는데 이제 와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부활시키겠다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기존 검사는 경영실태평가 수준이어서 제재가 아닌 일종의 컨설팅으로 개선안 권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앞으로는 종합검사 부활을 통해 제재 수위를 높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금융권에선 민간 금융사를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또 논란이 되고 있는 보험사의 자본규제 강화 방안(보험업법 개정)에 대해서는 “금융그룹 통합감독법안과 조화롭게 해결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매각을 압박했다. 더 큰 문제는 금감원이 독자적인 제재권한을 강화하면 예상치 못하게 금감원을 통한 입김이 시중은행에 바로 작용하는 등 관치금융이 노골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국민연금 인사 개입 논란처럼 정치권이나 대통령 측근 인사의 민원이 금감원을 통해 여과 없이 시중은행에 전달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지배구조 문제를 제기한 배경이나 논란 과정을 복기해보면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관측이 가능하지 않느냐”며 “지금도 금감원이 얘기하면 쩔쩔매는데 앞으로 금감원이 과도하게 은행 경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독립성을 키우겠다는 것이지만 여전히 금감원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것이다.
윤 원장이 이날 내놓은 혁신안은 청와대의 금융개혁 목소리를 반영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부에서는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앞두고 금융위와 금감원이 금융시장을 상대로 주도권 경쟁을 벌이면서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양측이 업권 전반에서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일 것 같다”며 “호랑이 원장이 왔다고 하더니 몇 년에 걸쳐 간신히 없앴던 규제들이 한꺼번에 부활했다”고 지적했다. 금융을 부가가치를 창출할 산업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로 보다 보니 감독규제 대상으로만 보면서 악순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들이 분담금을 내고 건전성 감독을 잘해달라는 것인데 이렇게 군림할 거면 분담금을 받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서일범기자 squi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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