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꼭대기에 초승달 하나가 내걸렸다. 도로변에서 보면 사다리꼴, 입구 쪽에서 보면 삼각형인 건축물이 범상치 않다. 안국역에 위치했던 ‘인사동 터줏대감’이자 서울 은평구 진관동으로 신축·이전해 11월 1일 공식 재개관하는 사비나미술관이다. 달은 러시아 출신 설치예술가 레오니드 티쉬코브(65)의 ‘프라이빗 문(Private Moon in SAVINA)’ 연작 중 하나다. 의학을 전공한 후 예술가가 된 티쉬코브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현대인의 고독감과 소외감을 환한 달빛으로 비추고자” 세계 각국을 돌며 한시적으로 ‘달’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전개 중이다.
관람객이 출입하는 미술관 정문은 삼각형의 꼭지점에 해당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공간과 시야가 넓어지면서 새로운 감각과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미술관은 재개관전으로 건축과 예술을 접목한 ‘AA프로젝트(Art&Architecture)’를 기획했다. 우선 1층과 4층의 유리창들이 초록색인 것, 이 나뭇잎 모양의 초록 시트가 미술관 주변 북한산의 자연색을 안으로 끌어들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작가듀오 진달래&박우혁의 설치작품이다. 주차장 입구에 설치된 빨간 테 두른 곡면거울은 베른트 할프헤르의 작품 ‘가디언즈’이고, 미술관 뒷면 외벽을 뚫고 나온 듯한 나뭇가지는 이길래의 ‘소나무’이다. 층과 층의 연결부도 작품이 파고들었다. 2층에서 3층으로 갈 때는 영화필름을 오려 만든 김범수의 작품이, 4층으로 오르는 길에는 막힌 벽을 빛나는 창으로 바꿔놓은 황선태의 ‘빛이 드는 공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밖에서 2층으로 바로 연결되는 외부계단에서는 벽돌에 글씨를 새긴 김승영의 ‘말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라!” “가볍게 걷는 자가 멀리 간다” 등의 경구는 유심히 봐야만 발견할 수 있다. 접이식 철제문을 밧줄로 잡아당기느라 끙끙대는 사람 형상은 양대원의 ‘문 밖의 인생’이다. 설치작품으로, 공간과 예술을 교묘하면서도 탁월하게 연결한 전시다.
탁 트인 2, 3층의 전시는 ‘그리하여 마음이 깊어짐을 느낍니다:예술가의 명상법’을 제목으로 내걸었다. 숯을 매달아 명상적 공간을 이룬 박선기, 수행하듯 볼펜으로 수 천 번의 선을 그어 신문지를 까맣게 채운 최병소 등의 작품이 깊은 울림을 전한다. 매일 산책길에서 채집한 나뭇잎을 그린 허윤희의 ‘나뭇잎일기’, 의자를 마련해 두고 기름때 찐득한 기계 부품을 닦아내게 하는 배성미의 ‘뜻밖의 노동’, 책을 갉아먹으며 삶터를 만들어가는 흰개미의 흔적을 보여준 강석호 등의 작품은 그림 보러 왔던 관객을 앉아서 경험하고, 사색하며 몰입하게 만든다. 5층 전시장은 레오니드 티쉬코브의 개인전으로 채워졌고 자연스럽게 루프탑(옥상)으로 연결돼 주변 경관을 내다볼 수 있게 구성됐다.
은평구 진관1로에 위치해 한국고전번역원과 나란히 자리잡은 사비나미술관은 전체 5층 건축면적 1,738㎡으로 이상림 대표가 이끄는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가 설계했다. 땅의 모양을 반영한 삼각형 건축물이 독특하다. 사비나미술관은 지난 1996년 ‘갤러리사비나’로 문을 열었고 주제가 있는 기획전 만을 고집해 왔다. 날씨·물 등 과학과 예술의 접목을 처음 시도했고, ‘교과서 미술전’ 등으로 방학특수 기획전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했으며, 상업화랑이 외면하던 작가들을 큐레이션이 있는 전시를 통해 발굴했다. 이후 2002년부터는 등록미술관인 ‘사비나미술관’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명옥 관장은 “미술관이 전시만 보여주는 시대는 끝났고 이제 관객은 색다른 경험과 일종의 힐링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찾고, 체험할 수 있는 미술관을 원하고 있기에 새로운 도약에 나섰다”면서 “은평구 제1호 미술관으로서 관객과 작가 모두가 좋아하는 미술관이자 국제적인 미술관으로 일궈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제공=사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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