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KT&G 경영권 분쟁 사태.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이 KT&G를 타깃으로 삼은 이유 중 하나로 KT&G가 집중투표제를 도입했다는 점이 꼽힌다. 집중투표제란 이사 선임 시 의결권 집중이 가능한 제도. 가령 3명의 이사 선임 시 각 주주는 3표의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데 주주가 첫 번째 후보자를 지지할 경우 자신의 3표를 이 후보자에게 몰아주고 나머지 후보에게는 표를 주지 않을 수 있다. 소액주주가 지지하는 이사가 선임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투기자본의 도구가 되기 십상이다. 실제 아이칸은 집중투표제가 자신의 편에 선 사외이사를 회사에 꽂을 수 있는 통로라는 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 아이칸은 시나리오대로 사외이사를 진출시켜 회사를 뒤흔든 끝에 차익(1,500억원)을 챙겨 나갔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투기펀드의 공세에 노출될 수 있는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이 담긴 상법 개정안을 이달 국회에 제출해 통과시키려 하는 점이다. 재계의 한 임원은 “지금 상법에서도 기업이 정관에서 집중투표제를 배제한다고 규정하지 않으면 집중투표제를 도입할 수 있다”며 “더구나 정관에 이 문구를 넣으려면 주총 특별결의(주주의 3분의1 이상 참석, 참석자의 3분의2 이상 동의)를 통해야 할 만큼 절차가 까다로운데 굳이 집중투표제 도입을 강제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집중투표제는 재벌개혁을 명분으로 정부·여당이 밀고 있는 상법 개정안이 얼마나 편향되고 허술한 기초 위에 서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글로벌 스탠더드 역행하는 독소조항 수두룩=전문가들은 상법 개정안이 ‘갈라파고스 규제’와 다름없다고 말한다. 안정적 성장을 위한 기업의 경영권 방어 보장, 지배구조의 자율선택을 통한 경쟁력 제고를 큰 축으로 하는 세계적 추세를 거스르고 있어서다. 재계가 우려하는 대표적 독소조항인 다중대표소송(모회사 지분을 0.01%만 보유하면 자회사 임원에게 소송 권리 부여)만 해도 일본만 법제화했다. 일본은 다중대표소송 발효 조건이 100% 모자회사로 국한돼 엄격하다.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곳도 러시아·멕시코·칠레 등 3개국뿐이다. 미국은 1940년대, 일본은 1970년대에 이미 기업사냥꾼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주주 간 파벌 싸움의 도구로 전락했다며 버린 제도를 뒤늦게 강제하려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임 도입도 전 세계에서 우리만 추구하는 ‘나 홀로’ 조항이다. 현재는 주총에서 1차로 이사들을 먼저 선출하고 2차로 이사들 중에서 감사위원을 뽑는다. 1차 투표에서 창업자 등 대주주의 의결권에 제한이 없어 대주주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없다. 하지만 분리선임이 도입되면 1차에서 감사위원을 뽑아야 하고 그 경우 대주주의 의결권은 3%로 제한된다. 소수 지분의 외국계 투기자본들이 규합해 자기들 입맛에 맞는 감사를 선임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의결권을 제한한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며 “주식회사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극소수 지분으로 그룹 ‘쥐락펴락’ 가능=다중대표소송도 심각하다. 모회사가 자회사 지분을 30% 이상 보유하고 모회사 주주가 모회사 지분을 0.01%(상장사 기준, 비상장사는 1%)만 갖고 있으면 자회사 임원에 대해 소송이 가능하다. 삼성전자만 해도 삼성디스플레이·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메디슨·세메스 등 지분 30% 이상을 들고 있는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 SK·LG·롯데 등 이미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그룹은 물론 현대자동차 등도 다중대표소송에 걸린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만약 어떤 자회사가 모회사와 거래하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곳과 거래를 트면서 모회사와 거래를 접을 경우 자회사에는 이득이지만 모회사는 다를 수 있다”며 “이때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임원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악용할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임원은 “상법 개정안을 보면 지배구조 이슈가 ‘선택’이 아닌 ‘도덕’ 문제로 변질되고 있음을 느낀다”며 “오너라고 하면 덮어놓고 백안시하는 일부 정치권의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은 외면=여야정은 지난 5일 ‘국정상설협의체’를 통해 ‘상법 개정안 등의 처리에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하반기 국회인 만큼 의원들의 상임위도 새로 배정됐다. 그 결과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에서 개정안을 다룰 의원 면면이 대거 갈렸다. 아무래도 개정안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할 개연성이 크다. 이런 환경이 개정안의 졸속 처리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재계의 한 임원은 “정부의 강력한 의지 등에 비해 개정안에 반대하는 의원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약하다”며 “자칫 소모적 정쟁의 거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정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오너 견제를 명분으로 투기자본에 유리한 조항은 도입한 반면 기존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장치는 외면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정부와 정치권에 포이즌필(기존 주주가 시가보다 싼 가격에 신주를 매입할 권리 부여), 황금주(특정 주총 안건에 거부권 행사가 가능한 권리가 붙은 주식) 등을 개정안에 도입할 것을 계속 건의하기로 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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