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낮아져 본 적 있는가. 툭툭 떨어진 낙엽 같은, 바닥에 닿은 시선으로 육중한 담벼락을 올려다보는 듯. 한없이 높아 하늘마저 가려버린 저 담이 이 우주의 전부인 양 압도적이다. 기필코 저 담을 넘으리라, 부수리라 억센 다짐 같은 건 엄두조차 낸 적 없건만 그냥 막막해 오는 불능 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가을이 간다 한들 울 수 없는 노릇처럼, 원망하거나 소리치지도 못하는 그런 심정이다.
화가 손상기(1949~1988)의 1984년작 ‘공작도시-독립문 밖에서’이다. 서울 풍경을 포착한 화가의 ‘공작도시’ 연작 중에서 ‘독립문 밖에서’ 본 도시의 한 단면이다. 닿을 수 없는 담 앞으로 건너지 못할 철조망까지 가세했다. 가뜩이나 얼듯 추워졌는데 마음마저 울적하게 만드는 그림이려나 염려한다면, 그렇지 않다. 어둡고 절망적인 작품은 결코 아니다. 저 담벼락 끝에 매달린 덩굴꽃이 희망이다. 내 비록 닿지 못해도 저렇게 내려와 손 뻗어 주는 존재가 있기에 그래도 또 한번 허리 세우고 살아보라는 위로를 얻는다. 화면의 8할을 차지한 벽이 돌아나가는 왼쪽 구석에, 서울 서대문구의 독립문이 보인다. 그 위로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 판잣집의 빨간 지붕이 봄 오면 피어날 장미꽃을 보는 것만 같아 슬프지도 않다.
손상기는 마흔을 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이중섭과 더불어 한국의 ‘천재화가’로 불리는 신화적 인물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그린 그의 대표작 ‘공작도시’ 연작 중에서도 유독 이 그림에서는 손상기만의 낮은 시선이 잘 드러난다. 이름만 꺼내도 ‘여수 밤바다~’를 흥얼거리게 하는 전남 여수에서 그는 태어났다. 어릴 적 구루병을 앓았다고도 하는데, 열 살 무렵 늑목에 매달려 장난치다가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 이듬해 ‘척추만곡’ 진단을 받은 그는 결국 웅크린 채 평생을 살아가게 됐다. 꾹꾹 누르면 더욱 딴딴해진다. “하루 종일 창문을 열어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게 일과처럼 된” 손상기는 신체적 불능 끝에서 천부적 재능을 찾아냈다. 그림을 그렸다. 놀리는 아이들을 향해 짱돌 들고 맞서던 소년은 이미 고등학생 시절 첫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고, 손수 초대장을 썼다. 그가 그린 ‘자라지 않는 나무’는 굵고 곧고 큰 나무 옆에 구부러지고 잘린 나무 둥치를 나란히 두고 있다. 일종의 자화상이다. 쌓인 눈의 흰빛보다 검푸른 어둠이 더욱 시리다. 이런 풍경에서도 둘러친 담은 유난히 높고 조금 휘어있다. 독립문 밖 담벼락처럼. 정면이나 위에서 조망한 그림과 달리 허리를 굽히고 눈을 낮춘 시점에서 본 풍경은 마치 곡면거울에 비친 것처럼 살짝 휘청이는 구도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관객들이 기분 좋게 감상하는 전통 명화들은 ‘내려다보는 시선’의 나르시시즘을 깔고 있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우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상기는 과감히 그런 안정감을 밀어냈다. 그림의 중심부는 공허하고 구도는 불안하다. 진솔한 명작, 진정성이 투영된 작품이라 불리는 이유다.
원광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해 전주와 익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림이 있었기에 손상기는 불구였음에도 불편할 뿐 불능할 일은 없었고, 불운과 불행이 교차했지만 불쌍히 여겨질 사람도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그는 수원으로 갔고 가르치던 여제자와 살림을 차렸다. 삶에 더욱 열 올렸고 그림에 흥이 실렸다. 딸도 얻었다. 하지만 행복은 찰나다. 뜨거운 사랑에 가난이 찬물을 끼얹었다. 다툼이 잦았고 그를 허락하지 않았던 아내의 가족이 둘을 갈라놓았다. 돌도 안 된 아이를 두고 떠난 그녀는 영영 다시 볼 수 없었다. 웅크린 아비는 딸아이를 움켜 안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이후 더 크고 따뜻한 새 사랑을 만나 둘째 딸도 낳고 안정을 되찾았지만 이따금씩 그는 먼 산 보듯 길 저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굽은 등에 실연에, 그는 혹 둘 솟은 낙타가 됐다. 자라지 않는 키에 불편한 몸이었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살며 파리의 변화무쌍한 유행을 덧없는 삶으로 그린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이었고, 가난한 화가라는 이유로 사랑을 잃고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서도 긴 목과 빈 눈(目)의 여인상을 그린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였던 손상기다.
“처음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상채기 난 나의 꿈과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에서였다. …그러나 그 후 나는 현실이라는 것, 역사라고 하는 것 그리고 민중, 그들의 아픔에 대하여 직시하게 되었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삶 그것을 또 하나의 작업과정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새 삶을 시작한 후, 작가는 1983년 가을 동덕미술관에서 연 개인전의 전시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자신도 도움이 절실하지만 더욱 힘들어할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이 사회의식으로 작품에 담겼다. 추운 겨울날 시린 길바닥에서 젖먹이 아이를 품에 앉고 좌판을 연 아낙 앞을 지나며, 물건 하나 사 줄 푼돈조차 없어 주머니 깊숙이 손 찔러넣은 채 지나가는 사내의 심경처럼. ‘공작도시-동(冬)’에서 줄 수 있는 것이 마음뿐이라는 게 미안해서 눈조차 마주치지 않게 고개 푹 숙인 그 남자가 어쩌면 화가 자신일지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신세 한탄을 접어두고 더불어 살아가는 낮은 곳의 다른 이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사람 내음’ 연작으로 불리는 여성 누드도 그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힌다. 크로키처럼 아주 빠른 필치로 그린 벗은 여성의 몸은 과감하고 격정적이다. 세세한 묘사가 아님에도 분위기와 정서는 정확하다. 눈코입을 알아볼 수 없게 뭉개거나 그리지조차 않았음에도 표정이 읽힌다. 이들 나부(裸婦)에게서, 욕망을 보지 못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화가가 그린 욕망은 구체적으로 꿀 수 없는 꿈, 추상처럼 아련하고 모호한 갈증 같은 욕망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08년 개최한 손상기 20주기 기념전에 맞춰 연구논문을 쓴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1983년 개인전 이후 인체표현의 경우 향토적 정서의 탈을 쓴 부유하는 인물상에서 실체감을 가진 묵직한 인물로 변화했다”면서 “여성누드의 본격적인 등장은 그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자신의 신체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짚었다.
난지도와 달동네를 비롯해 도시의 어둠을 훑은 ‘공작도시’ 연작은 마른 유화를 뾰족한 도구로 긁어낸 날카로움과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것 투박함이 공존하면서 화려하지만 허무한 대도시의 속성을 꼬집는다. 꽤 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같다고 평하는 ‘시들지 않는 꽃’ 역시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에게 작가 자신의 투영한 것이 느껴지지만 담담하고, 심지어 어둠 속에서 실낱같은 빛이 느껴진다. 화려한 소비문화와 여성의 상품화를 다룬 공작도시임에도 노랑 풍선을 든 아이를 그려 넣었고, 시들어 고개 떨구고 담장 끝에 겨우 매달린 꽃이지만 화사하게 그렸던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과 위로를 잃지 않았다.
천재의 요절은 숙명일까. 말년의 그는 폐결핵에 걸렸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병상에서 그린 ‘공작도시-영원한 퇴원’은 잘 정돈된 병원 침대 위에 지팡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병 털고 일어나는 날에는 지팡이도 떨치고 가리라. 하지만 그는 영면에 들었고 40년 안 된 인생, 20년 남짓한 화가생활로 약 1,500여점의 유작을 남겼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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