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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브랜드 이야기 (21)] 에르메스, 명품시계서도 빛나는 존재감

<이 콘텐츠는 FORTUNE KOREA 2019년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에르메스가 기발한 아이디어와 개성 넘치는 디자인으로 명품시계 분야에서도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011년에는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에 성공하면서 시계 브랜드로서도 한층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1930년 제작된 Boutonniere 회중시계. 가죽과 시계의 조화가 경이롭다. 사진=에르메스




‘시계 브랜드 이야기’ 코너에 에르메스가 올라온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코너는 하이엔드 명품시계 브랜드의 정점 파텍필립부터 스위스 시계산업을 절멸 직전까지 몰아넣은 세이코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성취를 이뤘거나 시계 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브랜드’만 선별해 소개해왔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에르메스는 시계 부문에서도 탁월한 성취를 이룬 브랜드다. 패션 부문의 아우라에 가려 시계 부문이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명품 패션 브랜드라는 수식어가 시계 브랜드 에르메스에겐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셈이다. 마감 및 완성도, 심미·창의성 등 영역에서 세계 수위를 다투는 에르메스 ‘시계 브랜드’를 소개한다.

◆ 마구 용품 전문점으로 시작

에르메스의 역사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 Tierry Hermes가 프랑스 파리 외곽지역에 마구(馬具) 용품 전문점을 오픈하면서 시작됐다. 에르메스는 당시 마구 용품 시장에서도 명품 브랜드로 위상이 대단했다. 특히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동부문 1등상을 수상하면서 에르메스는 마구 용품 브랜드로서 최전성기를 맞았다.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왕실과 귀족 가문에만 상품을 공급할 정도였다.

1900년대 들어 자동차가 보편화하기 시작하면서 에르메스는 잠깐 위기를 맞았다. 사람들이 말 대신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마구 용품 수요가 급전직하했기 때문이다. 당시 에르메스의 수장이었던 에밀 모리스 Emile Maurice(창업주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는 신사업 모색에 나섰고,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이 패션사업이었다. 기존 사업 영역에서 축적했던 가죽 손질과 수작업 기술 역량을 벨트나 가방, 의류로 손쉽게 이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배경이 됐다.

1912년 제작된 Porte-Oignon 시계. 100여 년 전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한다. 사진=에르메스


◆ 1912년 첫 시계 론칭

에밀 모리스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장인들을 비롯한 인프라가 이미 갖춰져 있던 에르메스는 빠르게 명품패션업체로 전환했다. 에르메스는 가죽을 소재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아이템에 손을 뻗쳤다. 스트랩에 가죽이 필요한 시계 역시 이 범주에 들었다.

에르메스는 1912년 Porte-oignon(프랑스어로 Porte는 문, Oignon은 양파를 뜻한다)이라는 첫 시계 모델을 론칭했다. 이 시계는 가죽 스트랩이 회중시계를 양파처럼 감싼 손목시계 모델이었다. Porte-oignon는 회중시계를 감싼 가죽 스트랩 전체가 은은하면서도 유려한 곡선미를 뽐내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 재밌는 아이디어로 눈길

1920년대 들어 에르메스는 시계를 좀 더 전문적으로 제작·판매하기 시작했다.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예거 르쿨트르 같은 손꼽히는 하이엔드 명품시계 제작사들과의 교류와 이들 매뉴팩처에서 제작한 무브먼트 사용으로 에르메스 시계는 기술적 완성도가 크게 올라갔다. 1928년에는 에르메스 핵심 매장 중 한 곳인 프랑스 파리 생토노네 24번가 메종에 별도의 시계 코너를 마련해 에르메스 최신 시계를 전시·판매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 에르메스는 전통적인 회중시계나 손목시계와 함께 재밌는 아이디어의 시계들을 론칭해 주목을 받았다. 가방에 부착하는 Bag Watch부터 벨트 버클에 무브먼트를 장착한 Belt Watch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계가 등장했다. Belt Watch는 골프 같은 운동을 할 때 시계에 충격이나 진동이 전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됐다. 착용자가 벨트 버클을 아래로 젖히면 다이얼이 나타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계였다.

1930년 제작된 Belt Watch. 벨트 버클 안쪽에 다이얼을 장착한 재밌는 제품이다. 사진=에르메스


◆ 전문 시계 제조사로 부상

에르메스는 1978년 스위스 비엔에 시계 부문 자회사이자 매뉴팩처인 라 몽트르 에르메스 La Montre Herm?s를 설립하면서 전문 시계 제조사로서의 역량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파르미지아니 산하 무브먼트 제조사인 보셰 Vaucher와의 제휴를 통해 하이엔드급 무브먼트 제작에도 참여했다. 에르메스는 2006년 보셰 지분을 25% 인수하면서 동반자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2006년은 에르메스가 라 몽트르 에르메스 매뉴팩처 내 가죽 스트랩 공방을 따로 마련한 해이기도 했다. 이는 가죽 손질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에르메스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자는 의도였다. 스트랩 가죽 선별부터 마감까지 인하우스로 생산하는 시계 브랜드는 현재까지도 에르메스가 유일하다.

◆ 이젠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

에르메스는 2010년대 들어서도 전문 시계 제조사로서의 역량 확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1년에는 시계 케이스 전문 제조사인 조세프 에랄드 Joseph Erard SA를, 2013년에는 고급 다이얼 전문 제조사인 나테베르 Nat?ber를 인수·합병하며 제작공정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에르메스 정도의 공정 수준을 확보하고 있는 명품시계 제조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에르메스는 2012년 첫 인하우스 무브먼트 H1837과 H1912를 발표했다.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은 하이엔드 명품시계 브랜드를 구분하는 척도 중 하나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디자인만으로도 당당히 명품시계 브랜드 한자리를 차지했던 에르메스가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완결성 갖추게 된 셈이었다. 에르메스가 명품시계 분야에서 어떤 모습을 더 보여줄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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