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사이로 학이 날아올랐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 스무 마리, 백 마리…구름을 뚫고 옥빛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고려가 꿈꾸던 하늘은 이렇게도 청초한 옥색이었단 말인가. 이 색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영원의 색이고 무아(無我)의 색이란 말인가.” -‘간송 전형필’(이충렬 지음, 김영사 펴냄) 중.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본 간송 전형필(1906~1962)은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맑고 푸른 빛이 감도는 청자의 화려찬란한 구름 문양을 가르는 69마리의 학이 자리 잡았는데 돌리면서 감상하면 1,000마리로 보인다 하여 ‘천학매병’이라 불리던 보물이다. 1935년 일본인 골동상에게 이 매병을 소개받은 전형필은 당시 서울의 고급 기와집 10채 값인 2만 원을 주고 품에 안았다. 개성 인근에서 발굴돼 골동 거간을 거쳐 일본인에게 넘어갈 뻔한 것을 그가 지켰고 지금은 국보 제68호이자 아름다운 고려청자의 대명사가 됐다.
이듬해에는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이 경매에 나왔다. 일제시대 서울 유일의 고미술 경매단체인 ‘경성미술구락부’는 일본이 설립한 합법적 문화재 반출 통로였다. 조선 백자가 소박한 게 보통이나 유백색 몸체에 코발트·철·동을 산화시켜 청색·갈색·홍색의 빛깔을 내고 국화와 난초, 각종 곤충 장식을 더한 이런 도자기는 유례가 없었다. 갓 서른의 전형필은 당시 뉴욕·런던에 분점을 둔 세계적 일본 거상 야마나카(山中)상회와 맞붙었다. 500원으로 시작한 경매는 “1만4,580원”을 부르게 한 간송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참기름병으로 전락한 우리 문화재까지 일본에 빼앗길 수는 없었다. 이 병은 국보 제294호다.
국보 6점과 보물 8점을 포함해 겸재 정선의 그림,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 60여 점을 전형필의 삶과 더불어 돌아보는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이 오는 3월말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 간송의 ‘문화재 독립운동’은 일본에 머물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의 소장품인 일명 ‘갇스비콜랙숀’에서 절정을 이룬다. 1937년, 불안한 일본 생활을 마무리하고 영국으로 떠나는 개스비가 도자기 컬렉션을 정리하려 하자 간송은 한달음에 현해탄을 건넌다. 20점의 도자기를 위해 물려받은 충남 공주의 1만 마지기 땅을 팔았다. 1마지기 면적을 충청도에서는 200평으로 치니 1만 마지기에 해당하는 200만 평은 남산 면적의 두 배, 축구장 925개 크기다. 당시 서울 기와집 400채 값과 바꾼 도자기들은 ‘고려청자기린형향로’ ‘고려청자원숭이형연적’ 등으로 훗날 국보 4점과 보물 5점으로 지정됐다.
전시를 관람한 미술사학자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간송 전형필 선생의 치열한 문화재 수집활동과 그분이 모은 빼어난 대표작들을 함께 보여주는 전시”라며 “훌륭한 문화재 수집가가 되기 위해서는 문화재에 대한 지대한 관심, 중요한 문화재를 알아보는 높은 안목, 수집 여부를 결정하는 빠른 결단력, 수집을 뒷받침하는 경제력을 겸비해야 하는데 간송 선생은 이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춘 최고의 수집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지난 1971년부터 서울 성북동 보화각에서 매년 봄·가을 전시를 통해 유물을 공개해온 간송미술관은 지난 2014년 3월 DDP 개관에 맞춰 첫 외부 기획전을 열었고 이곳에서만 12번의 전시를 개최했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이르면 올가을, 늦어도 내년 봄쯤 다시 성북동에서 관람객을 맞이할 계획”이라며 “1938년에 지어 대규모 관람에는 불편함이 있던 간송미술관(보화각) 건물은 1950년대 당시 형태로 복원해 시민에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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