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이 지난 8일 19년 만에 실시한 총파업 결과를 두고 은행산업의 ‘민낯’만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직원 1만7,000명 중 절반이 넘는 노조 추산 9,000명(국민은행 집계 5,500명)이 파업에 참가했는데도 은행 영업에 문제가 없었고 고객들로부터는 “내가 낸 돈으로 이자 장사 하면서 파업까지 하느냐”는 냉소가 나온 탓이다.
이 때문에 이번 파업을 계기로 은행업의 생산성 및 효율성과 공적기능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해볼 때가 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금융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9일 “글로벌 금융산업은 디지털로 달아나고 있는데 귀족노조가 은행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먼저 은행산업의 인력과 영업구조에 대해서는 현재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비대면 채널 확대 등으로 인터넷·모바일뱅킹 및 현금자동입출금기(ATM)·텔레뱅킹 등을 통한 금융서비스 거래 비중이 이미 90%를 넘겼지만 은행 영업점포 축소나 인력 감축은 사실상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실제로 지난해 3·4분기 기준 국내 은행의 영업점포(지점+출장소)는 총 6,784개로 전년 대비 66곳 줄어드는 데 그쳤다. 매년 150개 넘게 줄어들던 추세에서 절반 이하로 감소폭이 낮아진 것이다.
이 같은 속도 조절의 배경에는 금융당국과 정치권, 노조의 ‘3각 압박’이 숨어 있다. 당장 금융당국부터 은행의 인력 감축에 부정적이다. 실제로 금융감독원은 은행 지점폐쇄에 대한 모범규준을 제정하는 방안을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다. 윤석헌 금감원장이 취임 이후 감독혁신안으로 내놓은 과제 중 하나다. 은행이 특정 지역의 점포를 닫을 때 주변 금융환경에 대한 조사를 의무화해 노인 등 취약계층이 금융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라는 취지다. 하지만 은행들은 이 같은 모범규준 제정을 사실상 압박으로 받아들인다. 점포 하나를 닫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취임 이후 시중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날 때마다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채용 확대를 압박했고 이에 따라 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은행은 지난해 전년보다 1,000명가량 많은 총 3,115명을 신규 채용한 바 있다. 대다수의 은행은 올해 여기서 얼마를 더 늘려야 할지 벌써부터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나마 희망퇴직이라도 정상적으로 이뤄지면 인력 순환이 가능하지만 노조가 나서 안건마다 발목을 잡으면 생산성 증가 없이 덩치만 비대해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정치권도 은행에 대한 압박에 가세한다. 은행이 특정 점포에 대해 철수 방안을 구상하면 점포 임대인인 건물주가 해당 지역 국회의원을 통해 은행 본점을 직접 압박하고 나선다는 것이다. 매년 수억원의 임대료를 떼일 염려 없이 안정적으로 지불하는 은행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건물주와 지역 유지를 통해 ‘표심(票心)’을 관리하려는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국민은행의 경우 지난해 3·4분기 누적 기준 임차료로 1,857억원을 지출해 점포 수 축소 추세에도 불구하고 전년 동기(1,707억원)보다 도리어 임차료가 늘었다.
여기에 걸핏하면 파업을 무기로 투쟁에 나서는 노조까지 가세해 정상적인 구조조정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게 금융회사 경영진의 토로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행 직원이 생산성에 비해 고임금을 받고 있어 노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이번 파업이 은행들의 사업구조를 선진화하는 기폭제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당국과 정치권, 노조의 다중압박에 밀려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인력 재배치 등에 관한 이슈를 본격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 논의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중은행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고위 관계자는 “은행 영업점에서 근무 인력이 3분의1로 줄어도 단순 금전출납 업무 등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며 “자산관리(WM)·투자은행(IB)·증권 등 비(非)이자 수익을 낼 수 있는 방향으로 은행 인력들을 전면 재배치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노사 타협이 진행돼야 할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서일범기자 squi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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