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과 천태만상이 얽히고설켜 요동치는 세상이다. 특정 이슈를 굳이 찍어 언급하지 않아도 매일같이 기함할 이야기가 뉴스를 장식한다. 이토록 요지경인 세상인데, 미술이 눈 감고 입 닦듯 아름다운 세상만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일종의 허위요 거짓말일지 모른다.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사명감 또한 현대미술의 역할이다.
여기 둥그런 화면 위로 수십, 수백 개의 작은 장면들이 재잘거리듯 변화한다. 초 단위로 바뀌니 눈 깜빡할 겨를도 없다. 제목의 ‘만다라’는 원래 우주의 진리를 표현하던 불화인데 ‘비밀스런 가르침’이라는 밀교(密敎)와 손잡으면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상징적 그림이 됐다. 나중에는 남녀 인물상이 더해져 성적(性的) 힘을 키우는 수행과도 연계되기도 했다. 성스러운 제목의 영상은 눈을 현혹한다. 그 안에 담긴 장면은 벗은 채 뒤엉킨 남녀의 분주한 움직임이다. 화면 전반의 붉은 기운은 부둥킨 남녀의 드러난 살결이었다. 작가는 책에서 스캔한 수많은 만다라 이미지를 편집해 동영상으로 만들고, 한편에서는 수십 개의 포르노 영상을 배경으로 돌려 이들이 서로 겹쳐지며 현란한 영상을 만들게 했다. 성스러운 종교와 세속적인 현세의 구분이 부질없다. 성(聖)과 속(俗)은 극단에서 맞닿았고 급기야 한통속이 되기도 한다.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만 활동하던 백남준이 1984년에 이르러 국내에 본격 소개된 것과 달리 일찍이 1970년대 말부터 영상매체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인 ‘토종 미디어 아티스트’가 바로 박현기(1942~2000)다. 박현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다라’ 시리즈는 1997년에 처음 발표 당시 돼지 몸에 문신 새기는 것으로 계획됐다. 하지만 당시 정부의 단속으로 문신하는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작가는 무용수의 몸에 영상을 비춰 보여주는 것으로 급변경했다. 그 해 박현기는 박영덕화랑이 기획한 특별교류전으로 미국 뉴욕 킴포스터갤러리에서도 이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를 앞두고 뉴욕의 골동품 가게를 살핀 작가는 빨간색 헌화대 하나를 찾아냈다. 전시장에 놓인 윗면 지름 약 1.2m, 높이 70㎝ 정도의 장엄하고 붉은 헌화대 위로 벗은 남녀의 분홍 살결이 투사됐다. 현지인들은 열광했다. 작가는 “우주의 진리를 표상하는 만다라는 원,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근원적 형태들로 우리의 염원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정신의 그릇”이라는 말을 남겼다.
박현기는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손재주 뛰어난 아버지가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끌러갔던 모양이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질 것이라는 흉흉한 풍문이 일던 그 해, 세 돌 지난 박현기와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 대구로 돌아왔다. 말수 적은 경상도 남자로 자란 박현기는 생각나는 게 있으면 스케치북에 그림 먼저 그릴 정도로 일찍이 미술에 대한 재능을 드러냈다.
1961년 홍익대 서양화과로의 진학은 자연스러웠다. 다만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서울 유학은 고단한 생활의 시작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하다 1964년에는 건축학과로 전과했다. 당시 홍익대에서 강의하던 건축가 김수근의 영향이 있었고 생계에 대한 고민도 없잖았을 터이다. 1967년 졸업 후 박현기는 대구로 내려가 인테리어 사업가가 됐다. 예술가와 생활인 사이의 고뇌도 함께 시작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성공한 사업가로 살다 추앙받는 예술가로 죽었다.
박현기는 1960년대 말 대구 달성군에 위치한 남평 문씨 세거지인 광거당을 드나들면서 ‘우리 것’에 눈 뜨고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에는 ‘대구현대미술제’를 비롯해 현대미술운동을 주도한 이강소와 김영진·최병소 등이 있었고 그들과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한 박현기는 자신의 대구 대봉동 설계사무소 ‘큐빅’을 현대미술가의 아지트로 삼았다.
1974년은 박현기에게 충격의 해였다. 대구 미국문화원 도서관에서 백남준의 1973년작 ‘지구의 축(Global Groove)’을 영상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그 때의 자극은 예술 동력이 됐다. 1977년 대구현대미술제에 참여한 작가는 낙동강변에 늘어선 포플러 나무 8그루의 그림자를 흰색 횟가루를 뿌려 그렸다. 단, 실재 그림자와는 반대 방향이었고 관념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그림자였다.
이어 1978년 초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이 된 일명 ‘비디오 돌탑’ 연작을 처음 발표했다. “박현기는 한국 전쟁 중 피난지로 유명했던 대구에서 피난 행렬 중인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며 ‘돌 주워라’라는 말을 전달하고 그렇게 주운 돌로 고개마루에 돌탑 쌓은 것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했다”는 게 지난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규모 박현기 회고전을 기획한 김인혜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김 학예사는 “전쟁 중임에도 바닥에 나뒹구는 돌 하나에 각자의 소망을 의탁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훗날 그가 ‘돌탑’ 작품을 만드는 데 중요한 잠재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작가인 친구들과 스튜디오 하나를 빌려 최초의 비디오 작업을 시작한 박현기는 새로 장만한 중고 캠코더로 무엇을 찍을까 망설이던 중 사진 인화용 액체가 흔들리며 조명이 흐릿해지는 모습을 눈여겨봤다. 물을 저어 그 위에 비친 모습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잠잠해지길 반복하는 장면이 그의 첫 영상 작품이었다. 발견과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박현기는 일본의 갤러리를 통해 대학교수를 소개받았고 당장 일본으로 가 비디오 기술을 익히고 돌아왔다. 이때 제작된 작품이 기울어진 모니터에 물이 채워진 것처럼 보이고 그 속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영상이 담긴 ‘무제(TV어항)’이다. 다음 해 선보인 ‘무제(반영)’ 연작은 낙동강 물 속에 거울을 고정해 그 물결을 담은 영상이다. 강물 위에 덩그러니 놓인 거울은 어느 것이 비춘 것이고, 어느 것이 비친 것인지 실재와 가상을 혼란스럽게 헝클어 놓는다. 평화롭고 잔잔한 주변 풍경을 놀리기라도 하듯.
1979년 참가한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는 ‘물 기울기’ 퍼포먼스를 벌였다. 들고 있는 TV를 기울이는 만큼 화면을 꽉 채운 물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작품이었다. ‘비디오아트’의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선진국 출신의 작가도 상상 못한 전위예술을 한국의 박현기가 선보였고 관심을 끌었다. 1년 뒤에는 프랑스 파리비엔날레에 초청받았다. 한국에서 가져간 비디오 장비가 현지 전압과 맞지 않아 한바탕 고생했지만 현지에서 구한 돌로 탑을 쌓았고 천신만고 끝에 ‘무제(비디오 돌탑)’를 완성했다. 돌탑 위에 놓인 TV와 돌무더기 사이에 낀 TV에서 돌 영상이 보이는 작품이다. 돌은 실체요, 이를 재현하는 TV수상기는 허상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영상이 상용화할수록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실을 예언하듯 보여줬다. 중첩된 실상과 허상 속에 감도는 팽팽함이 관객을 일깨운다. 머리에 돌을 맞은 듯 정신이 든다.
박현기는 건설업의 호황으로 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그 덕에 작품 팔릴 일 고민하지 않고 원 없이 하고 싶은 작업에 도전할 수 있었다. 하나 너무 시대를 앞서 간 그는 2000년 갑작스런 위암으로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다. 작가 사후 지난 2012년에 유족이 약 2만 여 점의 아카이브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고 덕분에 가까스로 작가의 업적을 잃지 않게 됐다.
“보이는가 무엇 있는가, 무엇이 뭔가.…이것인가 저것인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작가의 선문답 같은 질문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순수와 저의가 뒤섞이고 의심과 의혹이 꼬리를 문다. 무엇이 보이는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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