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에는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이룬 것으로 기술돼 있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645년 고구려 원정에 나섰고, 660년에 백제 수도 사비성을 함락한 후 668년에 신라군이 고구려 평양성의 항복을 끌어냈다. ‘통일’의 사전적 정의는 ‘나누어진 것들을 합쳐서 하나의 조직·체계 아래로 모이게 함’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라면 고구려·백제·신라는 원래 하나였던 것이었나.
하지만 7세기 삼국의 정치적 상황과 인식을 감안하면 당시의 전쟁에 ‘통일’이나 ‘통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대사 연구자인 이재환 홍익대 겸임교수는 ‘삼국통일과 통일신라의 재조명’을 특집으로 다룬 계간지 ‘역사비평’ 봄 호에서 “7세기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은 국제전임을 부각해 ‘7세기 중·후반 동북아시아 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대에 삼국이 동족의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그 이유다. 이 교수는 “통일은 사전적으로 원래 하나였던 것이 나누어졌을 경우 이를 다시 합칠 때 사용한다”며 “신라에 의해 ‘삼한일통의식’이 표방되는 것은 빠르게 보아도 전쟁 이후이므로, 전쟁 종반부에 신라가 백제·고구려와 동질성을 자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영토 통합에 있어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했다. 특히 고구려 땅의 일부만을 신라가 차지했을 뿐이며 이후로도 발해가 한반도의 북쪽에서 독자적 역사를 써 나갔다. 7세기 신라가 이룬 삼국통일의 영토는 북한 강원도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 있는 ‘반도 통일’에 불과했다. 굳이 ‘삼국통일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싶다면 “고려가 후백제와 신라를 합쳐 나간 과정”이 오히려 더 부합한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흔히 ‘삼국통일’이라 불리며 삼국을 아우르는 통일의식을 뜻하는 ‘삼한일통의식’은 7세기 당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인 9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이념으로 보편화했다.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의식’을 기고한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는 7세기 삼국 간의 전쟁은 “자신을 괴롭히는 외적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보였고 “신라의 ‘삼한일통의식’은 9세기에 비로소 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의 옛 도읍에서 일어난 ‘김헌창의 난’(822년)이나 왕실 내분을 수습하고 재건한 황룡사구층목탑의 ‘찰주본기’(872년)의 내용 등이 그 근거다. 윤 교수는 역사적으로 이질성을 가진 존재들이 통합됐을 때 대개 분열의 위기에서 ‘통합’ 논리가 강조된다며 “삼한일통의식이 7세기 전쟁의 이념적 근거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전쟁 이전에 삼국이 동질의식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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