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계에서는 주주총회를 앞두고 노동이사제 도입 논의로 분주하다. 이런 움직임에는 대주주로서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자리한다.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민연금이 은행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라’고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탓이다. 재계에서는 국민의 노후 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수익률보다는 정권의 ‘기업 길들이기’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실제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에 소속돼 있고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다. 이런 구조가 국민연금의 독립적 의사결정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19일 한국경제연구원이 미국 캘퍼스(CalPERS) 등 해외 연기금과 국민연금 등 세계 5대 연기금(자산 기준)의 지배구조 및 의결권 행사 방식 등을 비교한 결과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다른 연금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유정주 한경연 기업혁신팀장은 “주식 보유액이 시가총액의 7%에 이를 만큼 국민연금의 시장 영향력이 막대하다”며 “자칫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취약한 지배구조와 맞물릴 경우 과도한 기업경영 개입에 따른 정부의 간섭 논란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하다”고 우려했다.
◇기금운용위에 장차관 참여…정부 입김에 취약한 국민연금=일본 GPIF, 캐나다 CPPIB, 캘퍼스, 네덜란드 ABP 등은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위원회에 해당하는 의사결정 기구의 독립성이 보장돼 있다. GPIF·CPPIB·ABP 등은 이사회 내 정부 인사가 아예 없고 모두 경제·금융, 연기금 전문가 혹은 기금을 조성하는 사용자·노동자 대표다. 주(州) 공무원과 교육공무원들을 위한 직역연금인 캘퍼스만이 이해당사자로서 주정부 인사 4명이 당연직으로 참가하고 있다.
반면 국민연금은 기금운용위 위원 20명 중 5명이 현직 장차관이다. 정부가 임명하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당연직으로 참가한다. 이 때문에 기금운용 결정 과정에 정부가 개입할 소지가 농후하다. 해외 연기금의 지배구조도 처음에는 우리와 비슷했다. 캘퍼스만 해도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기금을 이용해 재정적자를 해소하려 하자 1992년 캘리포니아주 헌법을 개정했다. 유 팀장은 “해외도 기금고갈 위험을 막기 위해 기금운용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쪽으로 지배구조를 고쳤다”고 말했다.
◇해외 연기금들, 의결권행사 외부에 위임=지난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은 올 3월 주총부터 경영 참여를 본격화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지배구조의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의결권을 직접 행사하는 만큼 정부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해외 연기금의 경우 자체 의결권 행사지침을 마련한 뒤 외부 전문기관에 의결권 행사를 위임하고 있다. CPPIB는 ISS, CPPIB는 페어베스트, 캘퍼스는 ISS, ABP는 글래스루이스 등에 의결권을 맡긴다. GPIF의 경우 의결권뿐만 아니라 스튜어드십 코드까지 위임했다. 해외 연기금의 경우 외부 자산운용사에 의결권 행사를 맡기고 오직 수익률에 집중하거나 의결권 행사는 물론 투자마저도 외부 전문기관에 맡기는 구조라는 얘기다. 그만큼 연기금은 노후 자금 관리라는 설립 목적에 최적화돼 있다.
국민연금의 증시 영향력이 다른 연기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국민연금의 지주회사화도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국민연금의 자산 내 주식보유 비중은 34.8%(2018년 기준)로 이 중 절반이 국내주식이다. 액수로는 109조원, 시가총액의 7%에 해당 된다. 삼성전자(8.95%), 현대차(8.71%) 등 내로라하는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 지분율은 10% 안팎에 육박한다. 이미 국민연금이 반대한 주총 안건의 통과 여부가 올 주총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로 부상했다. 반면 네덜란드 ABP와 캐나다 CPPIB는 국내주식 보유 비중이 각각 0.5%, 2.4%에 그친다. 일본 GPIF의 경우 국내주식 비중이 국민연금보다 더 높은 25.3%에 이르지만 GPIF의 주식 직접 매매를 금지하고 있다는 게 한경연의 설명이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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