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친구분’의 부탁으로 보험에 가입했는데 이후 아무런 관리도 못 받다가 최근에 그분이 이직을 했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병원 신세를 져 보험금을 신청했는데 보험사는 보장범위가 아니라며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약관을 자세히 보니 알쏭달쏭하게 적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가입 때 설명이라도 들었으면 보험을 들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억울하다는 생각뿐입니다.”
보험 가입 여부를 떠나 소비자들이 한 번쯤 들어봤을 ‘보험 괴담’이다. 설계사가 챙기는 수수료가 높은 종신보험을 연금보험인 것처럼 설명하는 등의 불완전판매나 관리해줄 설계사가 사라지는 ‘고아계약’이 급증하고, 가입 때는 간·쓸개 다 빼줄 것처럼 설명해놓고 정작 보험금이 필요할 때 신청하면 약관을 이유로 거절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함에 따라 국내 보험상품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괴담도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불신을 키우는 이유 중 하나는 최고경영자(CEO)의 임기다. 제조업과 달리 보험산업은 최소 5년 이상 바라봐야 하는데 국내 보험사 CEO의 임기는 짧게는 1년, 길어야 3~4년이다. 국내 보험사 CEO 중 오너인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20년)과 홍봉성 라이나생명 대표(10년), 차남규 한화생명 부회장(9년), 하만덕 미래에셋생명 부회장(9년), 이철영 현대해상 부회장과 박찬종 사장(7년)을 제외하면 4년 이상 CEO직을 맡고 있는 사례가 전무하다. 특히 최장수 CEO인 신 회장은 오너 CEO이다 보니 20년 넘게 경영을 맡고 있지만 전문경영인 가운데 10년을 넘긴 사람은 거의 없다. 보험 업계에 오래 몸담아온 한 고위임원은 “짧은 CEO 임기는 보험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2~3년짜리 CEO는 나중에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의 임기 동안에 매출 성과를 낼 수 있는 잘 팔리는 상품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나중에 보험금 지급이 개시되는 시점에는 회사 부실을 키우게 된다는 것이다. 짧은 임기 동안 성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경쟁사 상품을 베껴서 파는 과열경쟁만 하지 장기적인 경쟁력 확보에는 관심이 덜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치매보험이다. 치매보험은 판단기준이 모호한 경증치매까지 수천만원을 보장한다. 일부 의사들이 이를 이용해 공격적으로 치매진단을 내려준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보험사 일반 직원들 사이에서까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보험사들은 앞다퉈 치매보험 출시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 안방보험이 대주주인 동양생명의 경우 중국 정부가 위탁경영을 하고 있는데다 과거 고금리확정형 저축성보험 판매에 따른 추가 자본확충을 1조원 넘게 해야 하는 리스크를 안고 있지만 CEO가 외형성장이라는 단기실적에 집착하다 보니 치매진단비는 물론 평생 간병비까지 보장하는 치매보험을 판매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안방보험의 추가 증자 여력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동양생명이 무리하게 외형성장을 추구한다며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 보험사 CEO는 “당장 가입자가 몰리고 이익이 나니 팔고는 있지만 10년 정도 지나면 손실로 돌아올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경영자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금융지주그룹에서는 계열보험사 CEO 자리를 퇴직을 앞두고 임시로 거쳐 가는 자리 정도로 여기는 풍토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2~3년이라는 짧은 임기 내 눈에 보이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보험을 많이 팔아야 하는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상품’일 수 있지만 보험사 입장에서는 결국 미래 손실로 이어져 결국 소비자 피해로 돌아오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다. 보험을 많이 팔려는 과정에서 약관을 대충 설명하는 불완전판매나 보험금 지급을 미루며 애를 먹이는 민원 증가 등의 문제가 늘어날 여지도 크다.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보험을 잘 아는 전문 CEO를 최소한 5년 이상 한자리에 머물게 하면서 장기적으로 경영을 해야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보험사 CEO는 “잘 아는 보험 CEO 한 분도 5년이 지나서야 겨우 보험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얘기할 정도로 보험은 일반 제조업과 달리 어렵다”며 “연임만 해도 장수 CEO라고 부르는 분위기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 보험이라는 산업의 특수성에도 원인이 있다. 보험금 지급이나 면책사유 등이 다소 어려워 일반적으로 보험소비자의 이해도가 낮기 마련이고 최근에는 독립보험대리점(GA) 등 다양한 판매채널 확대와 함께 불완전판매를 예방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금융당국과 보험사들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펼치고 있다. 복잡한 보험약관을 단순화하거나 판매 시 충분한 설명을 통해 불완전판매 소지를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보험 가입 당시와 달리 급변하는 의료환경 속에서 약관을 간단히 쓰면 그만큼 모호해져 단어 하나를 두고 법적 다툼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보니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도 지난달 관련 간담회를 열고 보험약관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하는 등 업계와 손잡고 개선안을 검토 중이다.
보험 판매 후 관리가 끊기는 ‘고아계약’을 방지하기 위해 보험판매 설계사들에 대한 수수료 지급 구조를 바꾸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보험설계사들은 보험 판매 후 첫해에 수수료의 50~90%를 몰아서 받는다. 미국(37%), 영국(44%) 등보다 높은 수치다. 금융위는 조만간 첫해 수수료 지급률을 낮추는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다만 설계사들의 반대는 보험 업계가 풀어야 할 과제다.
보험산업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보험사들은 보험금 지급 문제에 대한 개선 의지도 강하다. 지난 2017년 892만여건의 보험금 청구 건수 가운데 3일 내 지급한 건은 전체의 94%였으며 10일 내 지급하는 건까지 합치면 98.5%에 달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머지 1.5%다. 특히 0.08%, 약 7,000건은 민원으로 이어진다. 미미한 숫자지만 금융당국 등이 동원되는 만큼 보험사 입장에서는 체감이 훨씬 크다. 신용길 생명보험협회장은 최근 “도수의학회·암의학회 등 여러 의학회와 협력해 보험금 산정에 관한 객관적인 판정을 요청하는 등 가입자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험유통 구조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안경철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지환급금이 있는 표준형 보험이나 자동차·실손보험 같은 단기 보험상품은 불완전판매가 주로 설계사가 가입을 권유하는 비대면 채널에서 발생한다”며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보험을 가입하는 포털·스타트업 등 다양한 플랫폼이 확대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주희·이지윤기자 ginge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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