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BoAML)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지난 2017년 9월에 정점을 찍은 뒤 감소하면서 성장률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며 “기업들의 소극적인 투자, 엄격한 정책환경 등을 감안할 때 한국경제의 반등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냉정한 진단을 내놨다. 실제 경제지표를 봐도 이러한 문제는 여실히 드러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2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설비투자는 전월보다 10.4% 감소해 5년 3개월 만에 최대폭으로 줄었다. 대외수요가 줄고 미중 무역분쟁의 불확실성이 대두된 여파다. 기업의 설비투자 감소가 경제 불확실성에 따른 심리 위축 및 규제강화와 연관된 만큼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이 나온다.
◇경기 비관에 투자 꺼려=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1일 “기업들이 글로벌 경기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어 설비투자가 부진하고 그나마 투자를 하는 기업들도 인건비 부담이 적은 해외로 나가고 있다”며 “지금 같은 구조로는 일시적으로 정부가 지출을 늘려 나타나는 효과일 뿐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민간 중심의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다 규제까지 막혀 있다 보니 투자가 살아날 수 없다는 뜻이다. 당장 자동차·화학 등 대부분의 제조업 기업들도 올해 설비투자를 축소할 계획을 갖고 있다. 김 교수는 “민간 쪽에서 규제를 풀어달라는 요청이 나와도 막혀 있다 보니 투자가 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비투자는 그나마 반도체가 견인해왔으나 수출 감소에다 반도체 시장 가격 조정의 영향으로 위축된 게 결정적인 여파로 작용했다. 건설투자 부문도 전망이 밝지 않다. 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방 주택시장을 중심으로 공급과잉이 나타나면서 건설투자가 둔화되고 있다”며 “정부가 생활 사회간접자본(SOC),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 건설경기 부양을 추진한다고 해도 워낙 민간 사이드 비중이 커 하락 기조 자체를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사업비 24조원 규모의 23개 사업에 대해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한다고 밝혔다. 또 12조6,000억원 규모의 13개 민자사업을 연내 착공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정 연구위원은 “기저효과 요인이 반영될 뿐 설비투자 개선폭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고 건설투자는 지난해보다 더 좋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하반기 반도체 업황을 중심으로 투자가 살아날 것으로 보는 정부와 한국은행의 시각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은은 지난 1월 경제전망에서 지난해 1.7% 역성장했던 설비투자가 올해 2.0%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상반기는 2.1% 감소했다가 하반기 6.3%로 대폭 개선될 것으로 전망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외국계를 중심으로 하반기에도 힘들다고 보고 있으며 낙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수도권 규제 완화를 통해 SK하이닉스가 120조원을 투자해 경기도 용인에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를 조성하기로 한 점과 현대자동차그룹이 서울시에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을 하는 사례 정도뿐이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 미국 경기가 꺾일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나라들이 이때 반등이 가능하리라고 상상하기 힘들다”면서 “경기와 동행하는 게 내구재이기 때문에 하반기 투자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재정 투입으로 일자리 수치만 나아져=부진한 고용 사정도 재정 투입 일자리 사업으로 수치상 개선이 나타났을 뿐이다. 고용의 질이 높은 제조업 취업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제조업 취업자 수는 지난달 15만1,000명 줄었다. 11개월 연속이다. 반대로 사회복지서비스업 등 나랏돈이 투입된 공공 분야의 취업자 수만 사상 최대 수준으로 늘고 있다. 2월 보건·사회복지서비스업 취업자 수는 23만7,000명 늘었는데 이는 통계 작성 이후 최대 증가폭이다. 안 교수는 “공공 부문의 단기 일자리 창출은 경기 둔화 속도를 늦추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다”라면서 “제조업이 부진한 상황에서 고용이 좋아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득주도 성장 정책 실패에 따른 고용 참사와 자영업 몰락이 내수 침체라는 결과를 불러왔고 국내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로 연결됐다”면서 “지난 2년간 경기 내리막길을 경험했지만 돌파구 마련에 실패했는데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종=황정원·한재영·박형윤기자 garde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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