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글로벌 시가총액 1위(920조원·올 2월 기준) 업체다.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도 애플에 뒤진다. 말 그대로 초대형 공룡이지만 설계·디자인만 빼면 부품은 모두 외주를 준다. 정보기술(IT) 업계에 드리운 애플의 그림자가 길고 짙을 수밖에 없다.
그런 애플이 재채기를 심하게 하고 있다. 지난해 10∼12월 중국에서 전년 동기보다 27% 빠진 매출을 기록한 데 이어 올 1·4분기도 실적 전망치를 내렸다. IT 업계에는 이미 ‘애플 리스크’가 강타했다. 메모리 반도체 피라미드 꼭지에 선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최대 시장인 스마트폰 수요가 빠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와 함께 애플의 복수 밴드가 되기를 학수고대해온 LG디스플레이는 초도물량 받기가 계속 미뤄지면서 중국 BOE와 한판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파운드리(위탁설계)도 애플 변수로 요동친다. 애플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칩 독점공급 업체인 대만의 TSMC가 실적 악화에 시달리면서 삼성과의 일전이 불을 뿜을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의 한 임원은 “애플로 속앓이를 하는 기업이 하나둘이 아닐 것”이라며 “애플이 초래하고 있는 시장 변화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부가가치 중심의 삼성·하이닉스 실적 주름살=모바일은 메모리 수요처 중 가장 든든한 축이다. D램 비중을 보면 모바일은 31.7%(2019년 예상·IHS마킷)로 서버(32.1%)와 1등을 다툰다. 올해는 서버의 재고 이슈가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스마트폰의 부진, 그것도 프리미엄 시장의 터줏대감인 아이폰의 침체는 메모리 기업에 악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지난해 전년 대비 4.1% 감소한 출하량(14억400만대)으로 처음으로 성장세가 꺾인 스마트폰 시장에 최대 호재라는 5세대(5G) 폰 출시도 애플은 내년 이후로 잡고 있다. 5G용 모뎀 칩을 공급하는 퀄컴과의 분쟁에 발목이 잡힌 탓이다. 업계의 한 실무자는 “5G가 이제 막 시작돼 진입하기에는 이르다는 판단을 한 셈”이라며 “메이저 업체가 동시에 5G폰을 내놓으면 5G 시장 개화도 빨라질 수 있는데 아쉬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애플에 공급하는 기업별 메모리 납품 비중은 전체 시장점유율과 비슷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D램의 경우 △삼성 41.3%(지난해 4·4분기 기준) △하이닉스 31.2% △마이크론 23.5% 정도다. XS 시리즈 등 신형 아이폰 가격이 100만원을 호가하는 만큼 메모리도 고사양 제품이 들어간다. 초격차 기치 속에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해온 삼성·하이닉스로서는 더 갑갑할 수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애플의 부진이 특정 업체에 더 큰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프리미엄폰에 들어가는 메모리 사양이 더 높다는 점에서 실적에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다른 한 관계자는 “애플 판매가 쪼그라들어도 삼성·화웨이가 잘나가면 메모리 업체가 받는 타격은 제한적”이라며 “아이폰의 메모리 용량도 다른 제품과 비슷한 64GB가 많아 큰 문제는 없다”고 전했다.
◇TSMC와 삼성, 파운드리 헤게모니 싸움 가열=애플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삼성은 흔히 ‘짚신 장수’와 ‘우산 장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에 비유된다. 그만큼 양면적이다. 가령 아이폰이 안 팔리면 메모리와 디스플레이는 실적 부진을 감수해야 하지만 스마트폰 사업은 득을 본다. 애플의 AP 칩을 TSMC가 독점공급한다는 점에서 갤럭시 시리즈에 ‘모바일 AP 엑시노스’를 납품하는 삼성의 파운드리사업부도 내심 웃을 수 있다. 스마트폰 매출 비중이 전체의 60%에 이르는 TSMC로서는 애플의 주문 축소로 실적 악화가 예상된다. 화웨이·샤오미 등 중국 스마트폰 업체의 기술력이 최정상 레벨까지 와 아이폰의 중국 시장 부진이 급속도로 진행될 여지도 있다. 파운드리 절대 강자 TSMC와 삼성과의 결전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업계의 한 임원은 “최신폰에 들어가는 AP 칩은 10㎚ 이하 공정으로만 만들 수 있는데 글로벌파운드리·UMC·SMIC 등은 포기했다”며 “아이폰 주문이 줄면 TSMC도 화웨이 등 다른 업체 물량을 더 맡아야 돼 삼성과 힘겨루기가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TSMC의 폭넓은 고객층, 급증하는 설계 수요 대기 등을 떠올리면 아이폰 수요 감소를 TSMC의 경쟁력 훼손과 연결짓기는 무리라는 견해도 있다.
◇LG디스플레이와 BOE의 애플 구애도 ‘후끈’=삼성디스플레이는 올 1·4분기 3년 만에 분기 실적 적자가 확실시된다. 많게는 -7,000억원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애플의 부진은 후발주자의 몸도 후끈 달게 만들고 있다. 중소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납품을 노리는 LG디스플레이와 BOE를 두고 하는 얘기다. 당초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4·4분기 애플의 초도물량을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스마트폰 업황 부진 등이 작용하면서 올 하반기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런 와중에 BOE는 기술력을 바짝 올렸다. 최근에는 화웨이의 전략폰 ‘P30프로’ 패널의 독점공급 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LG디스플레이와 BOE 모두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으로는 한계를 느껴 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어 애플에 대한 패널 납품 결과는 업계 구도 재편을 유인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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