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은 백남준의 작품을 가까이서 접할 장소를 여럿 확보하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가 대표적이지만 에버랜드로에 위치한 삼성화재교통박물관은 숨은 보물창고다. 클래식 자동차를 위주로 세계적 명차를 전시한 이 박물관으로 향하다 보면 정문 앞뜰의 야외전시장에서 은색으로 뒤덮인 클래식 자동차 여러 대를 마주하게 된다.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인 이것들이, 바로 백남준의 작품이다. 지난 1997년에 제작한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조용히 연주하라’이다. 이 32대의 자동차가 첫선을 보였고 단숨에 5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은 곳은 독일의 소도시 뮌스터였다.
백남준은 1987년과 1997년에 걸쳐 뮌스터와 인연을 맺었다.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주에 속한 소도시 뮌스터는 지난 1648년에 ‘30년 종교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지로 유명하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 도심 대부분이 무참히 타버렸던 작은 도시를 다시 일으킨 것은 예술의 힘이었다. 1977년 처음 시작해 10년에 한 번씩 열리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덕분이다.
뮌스터 시가 미국 조각가 조지 리키(1907~2002)의 움직이는 조각인 ‘세 개의 회전하는 사각형’을 거금을 들여 구입하려 하자 시민들이 격렬하게 항의한 1974년의 사건이 이 행사의 발단이었다. 공공예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깨워야 한다는 절박함, 미술관 안에만 갇혀있지 않고 일상 가까이 존재하는 미술의 필요성에 공감한 클라우스 부스만과 카스퍼 쾨니히가 설립자로 나섰다. 주민들의 구박과 멸시로 시작했지만 오늘날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베니스 비엔날레, 카셀 도쿠멘타와 더불어 유럽의 3대 현대미술제로 자리 잡았다.
백남준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두번이나 참가했다. 첫 번째는 1987년 제 2회 행사였다. 백남준은 뮌스터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가 나지막한 곳에 TV모니터와 투박한 불상을 마주 놓았다. 제목은 ‘오리를 위한 TV 부처’다. 백남준이 모니터를 이용한 현란한 화면의 설치작품으로 유명하지만 그와 더불어 손꼽히는 대표작이 바로 ‘TV 부처’ 시리즈다. 1974년 1월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서 4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제작비가 부족해 TV를 한 대밖에 쓸 수 없어 그 맞은편에 불상을 둔 것이 ‘TV 부처’의 시작이었다.
폐쇄회로(Closed Circuit·CCTV) 카메라를 이용해 모니터 앞에 앉은 불상의 모습이 실시간 촬영된다. TV 앞에 앉은 부처가 TV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된다. 불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갇히고 카메라의 감시 아래 놓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적 지혜의 상징인 부처는 현대의 나르시스가 되는 것”이라는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과격한 퍼포먼스로 동양에서 온 ‘테러리스트’라 불리던 작가 백남준에 대한 평가의 지평도 넓혔다. 단순해 보이는 작품이지만 동양의 선(禪) 사상과 서양의 기술력이 동시에 구현된 작품이었다.
카메라가 불상을 비추고, 촬영된 불상을 또 부처가 바라보는 그 돌고 도는 구조가 CCTV의 본질을 꿰뚫으면서 “진짜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고 있으니 동양인이라면 돌고 도는 윤회 사상을 떠올리고, 서양인이라면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까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1987년 뮌스터에 선보인 ‘오리를 위한 TV부처’는 시적인 작품이 자연 속에 놓여 물가를 떠다니는 오리를 위한다는 ‘위트’까지 던져 호응을 얻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백남준은 뮌스터로부터 또 한 번 초청받았다. 1996년 4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5개월이나 입원했던 그는 휠체어에 앉아 거동이 불편했지만 작업에 착수했다. 백남준은 작품 기획안에 “20세기 특징은 조직적인 폭력, 대중매체, 물신숭배이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소비주의이고, 이 중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항목은 폭력이다”라고 적었고 다가올 미래 사회는 소비보다 창조가 더 중요할 것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작가는 20세기의 욕망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자동차를 택했다. 32대는 자신이 태어난 1932년을 뜻한다. 늘상 “돈이 없다”고 투덜대면서도 가진 돈을 털어 클래식 자동차를 한 대씩 구입했다. 1924년형 윌리부터 1959년형 뷰익까지 20세기 기술 발전사의 증거물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들이 모였다.
백남준은 이 귀한 차들을 모아놓고선 표면을 은색 도료로 뒤덮었다. 우아한 명차들이 흡사 은박지로 감싸놓은 듯 색과 빛을 잃었다. 자동차 안에는 폐기처분 된 TV 모니터를 쌓아놓고 오디오 장치로 모차르트의 진혼곡(레퀴엠)이 흐르게 했다. 작가는 자동차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32대의 은색 자동차들을 뮌스터대학교 본관 앞 슐로브 광장에 설치했다. 자동차를 8대씩 무리 지어 원형, 삼각형, 평행사변형, 지그재그 선 모양의 4개 그룹으로 배열했다.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라는 제목 뒤에는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조용히 연주하라’는 부제를 붙였고, 거기다 “해질 녘에서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사람들이 불평할 때까지 연주하라”는 지시문까지 달았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자동차와 친숙했다. 지금이야 자동차가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지만, 일제 시대에 유년기를 보낸 경우라면 좀 이례적이었다. 가마 타고 말 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룬 막대한 재산 덕에 백남준은 “당시 경성(서울)에 딱 2대 뿐 이라는 캐딜락 승용차”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1940년대 서울은 캐딜락은커녕 자동차 자체가 귀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두고 백남준은 “혼자 차 타고 다니는 게 무안해서 학교 근처에 내려 걸어서 등교한 적도 있다”고도 털어놓았다.
그런 백남준이 자동차를 학대한 이유는 20세기의 산업문명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죽음 앞에서 연주하는 그 음악을 사람들이 짜증 낼 때까지 틀어놓으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동차를 때려 부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즉 소비중심의 사회는 끝났지만 이 기술력을 기반으로 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던 창조의 시대를 찾아가자는 뜻을 품고 있다. 처음은 어설펐고 두 번째도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는 백남준이 32대의 자동차를 선보인 그 해 처음으로 관람객 50만 명을 넘기며 성공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전시는 만족스러웠으나 문제는 그 뒤였다. 일단 작품 규모가 엄청나니 보관을 하려 해도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자동차 32대가 들어갈 만한 수장고도 없었을뿐더러 작품 제작을 위해 진 빚도 골칫거리였다. 그런 백남준을 돕기 위해 삼성그룹이 나섰다. 백남준은 1995년 호암상 수상자로 직전 해에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도 열었던 터였다.
자칫 폐차장으로 갈 뻔한 백남준의 은빛 자동차들은 삼성의 후원을 인연으로 지금의 용인 교통박물관에 둥지를 틀게 됐다. 백남준 작품의 상당수가 그렇듯 작품 관리가 쉽지만은 않다. 이를테면 노후한 자동차 바퀴가 주저앉지는 않을까도 걱정해야 할 일 중 하나다. 자동차 안에 설치된 오디오 장치를 연결하는 전선이 자동차 사이를 오가는데, 이것이 관람객 눈에 띄면 안 되기 때문에 보도블록을 떼어 내고 배설한 후 다시 까는 식으로 설치도 까다롭다. 그래서 지금은 음악은 연주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장엄한 진혼곡을 들었어야 할 20세기는 이미 19년 전에 물러났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전기차, 수소차를 넘어 사물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미래 자동차 시대를 백남준이 살아간다면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지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