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영국 런던에서 기차로 3시간여 이동해 도착한 노스요크셔주 셀비. 20층 아파트 높이의 냉각탑 8개를 갖춘 에그버러 석탄화력발전소가 육중한 외관을 드러냈다. 지난 1970년에 문을 연 이 발전소는 한창때 200만가구에 전력을 공급했다. 하지만 이날 찾은 발전소에서 설비가 돌아가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지난해 폐쇄가 결정되면서 가동이 전면 중단된 탓이다. 냉각탑 곳곳에 묻은 검은 얼룩을 보며 한때 뜨거운 증기를 토해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반세기 가까이 운영됐던 에그버러 발전소가 문을 닫은 것은 영국 정부의 ‘탈(脫)석탄’ 정책이 본격화하면서다. 기후변화가 시대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영국 정부는 2015년 자국의 모든 석탄발전소를 오는 2025년까지 없애는 방안을 공식화했다. 불과 10년 안에 핵심 에너지원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지만 영국은 큰 혼란 없이 ‘저탄소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국의 환경싱크탱크 ‘e3g’의 최고경영자(CEO) 톰 버크는 “시민들은 스모그로 수만명이 사망했던 사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며 “환경오염으로 겪어야 하는 참혹한 피해가 DNA처럼 남아 있는 탓에 석탄 연료 감축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미술관이 돼버린 석탄발전소…2025년까지 ‘0’=런던 템스강 남쪽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100m 높이의 굴뚝과 잿빛 벽돌로 외벽을 메운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언뜻 여느 공장과 달라 보이지 않는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이다. 노후 석탄발전소였던 뱅크사이트가 폐쇄된 뒤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한때 영국의 심장에서 산업을 이끌었던 발전소가 이제는 역사 속 유물로 남게 된 것이다.
탈석탄 움직임은 런던을 넘어 영국 전역에서 감지된다. 정부 정책에 따라 2025년이면 영국 내 모든 석탄발전소가 사라진다. 에그버러 발전소가 폐쇄되면서 명맥을 유지하는 곳은 현재 7곳. 올해도 노팅엄셔주에 위치한 코탐을 포함해 3개 발전소가 추가로 문을 닫을 예정이다.
석탄발전은 1950년대만 하더라도 영국 발전의 97%를 차지하던 핵심 전력원이다. 영향력이 줄기는 했지만 2010년대 초반까지 발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달했다. 지난해 국내 발전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과 비슷한 수준이다. 의외인 것은 ‘에너지 믹스’의 핵심 축을 없애겠다는 정부 방침에 대한 반발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버크 CEO는 “영국 시민 10명 중 1명이 환경단체에 적을 두고 있거나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시민뿐 아니라 기업들도 에너지 전환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저탄소 시대, 발전원 다양화로 대응=영국은 석탄이 사라진 자리를 메워야 하는 과제를 받아들었다. 정부는 탄소 배출이 적은 에너지를 활용하되 다양한 발전원을 에너지 믹스에 넣기로 했다.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특정 발전원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영국은 우선 풍력발전을 필두로 한 재생에너지가 석탄의 자리를 대체하기를 바란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데다 얕은 해수와 북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등 풍력발전을 위한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춘 터다. 실제 영국의 풍력은 빠른 속도로 가격경쟁력을 확보해나가고 있다. 영국 해상풍력의 가격경쟁력을 가늠할 수 있는 정부 입찰가격 추이를 보면 2017년 57.5파운드로 2년 만에 절반으로 낮아졌다. 영국 정부는 2030년까지 풍력발전만으로 전체 전력의 3분의1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재생에너지 성장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석탄발전 축소와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 사이에 전력 공백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영국이 가스발전 비중을 높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석탄과 마찬가지로 화석연료이기는 하지만 절반 수준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질소산화물이 75%가량 적게 나와 대체에너지원으로 조명받고 있다. 이에 따라 폐쇄 예정인 상당수의 석탄발전소가 가스발전소로 전환하고 있다. 지난해 문을 닫은 에그버러 발전소 역시 내년 2,500㎿ 규모의 가스발전소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마지막 퍼즐 원전=가스발전 역시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터라 가격 변동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자국 내에서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원전을 에너지 믹스에 넣었다.
눈길이 가는 것은 영국 정부가 화석연료 대비 원자력의 친환경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정부는 저탄소에너지 발전 비중이 지난해 50%를 넘어서면서 화석연료의 영향력이 줄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는데 저탄소에너지로 분류되는 게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이다. 영국의 에너지 정책을 주도하는 기업에너지부의 클레어 페리 장관이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현재까지 대량으로 저탄소에너지를 지속 공급할 수 있다고 증명된 기술은 원전뿐”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그 위상이 국내와 사뭇 다르다. 물론 영국 내에서 원전을 향한 따가운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도시바가 무어사이드 원전에서 철수하면서 경제성 논란이 불거진데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용이 낮아지면서 원전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다만 비중을 지금보다 늘리는 게 제한적일 뿐 탈탄소 시대를 맞이한 영국에서 원전은 여전히 한 축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는 “2030년이면 원자력을 포함한 저탄소에너지가 전체 전력의 70%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셀비=김우보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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