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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서류·긴급복구조항...보호주의에 우는 전선업계

중동, 국제규격 외 별도인증 요구

알토란 시장서 발주 크게 줄어

伊 등 유럽도 '자국어 입찰' 텃세

엔지니어 24시간내 현장 출동 등

잇단 조건 내걸어 해외 입찰 막아

미국 동부 버지니아에서 대한전선의 초고압케이블을 매설하는 모습. 이와 관련 대한전선은 410억원의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사진제공=대한전선






최근 중동에서 발주될 예정인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시장 조사를 하던 한 중견 전선업체는 현지 분위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중동 국가들이 조만간 입찰 서류를 아랍어로만 접수할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중동 현지 전선업체의 기술력이 많이 올라오면서 경쟁이 버거운 판에, 입찰 서류 규제로 해외 업체에 페널티를 줄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 회사의 한 임원은 “통상 입찰 서류 접수는 항상 영어로 했다”며 “그간 대형 프로젝트가 많아 알토란 시장으로 꼽혀왔던 중동에서도 발주 급감, 텃세 심화 등으로 영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2일 전선 업계에 따르면 각국 정부가 입찰 심사, 무역 정책 등을 통해 외국 기업의 시장 진입에 사실상 족쇄를 채우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규제 카드도 △현지 언어 입찰 △국제 규격 외에 별도의 인증 요구 △긴급 유지 보수 의무화 △해외 기업 원천적 입찰 불허 등으로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대만은 지난해부터 2023년까지 161kV, 345kV급 등 초고압케이블 입찰에 외국 기업 참여를 배제하고 있다. 전력케이블이 국가 인프라인 만큼 자유무역의 예외 품목으로 삼아 자국전력 산업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에 따른 조치다. LS전선·대한전선·일진전기 등 국내 초고압케이블 3사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자국 초고압케이블 3사(후루카와·스미토모·쇼와)에만 전력망 구축사업을 맡기고 있는 일본에 이어 대만마저도 시장 참여가 막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프랑스 등 전력 선진국이 많은 유럽도 사정은 비슷하다. 가령 국제입찰을 진행할 때 긴급복구조항이나 자국어로 입찰을 진행해 우회적으로 자국업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한 전선업체의 관계자는 “공고를 현지어로 띄우는 것은 기본이고, 해저케이블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제조사 엔지니어가 24시간 내 사고 현장에 직접 와야 한다’, ‘준공 이후 AS센터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 등 제약 조건을 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유무형의 페널티 탓에 국내 기업이 유럽 진출에 성공하는 경우는 발주 규모가 현지 업체의 캐파를 초과하거나 영국 등 자국 전선 업체가 없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한정된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각국 정부가 통상 마찰을 우려해 명목상 국제 입찰을 유지하고 있지만, 세부 내용을 보면 보호주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결과 국내 업체는 들러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최근 중동에서는 중국처럼 자국 내 인증제까지 만들어 국제 인증 외에 별도의 인증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의 한 임원은 “전선업체들이 크게 의존했던 중동의 발주물량이 셰일 혁명에 따른 유가 하락으로 급감한데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보호주의 파고가 더 거세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대한전선의 경우 미국에서 작년의 3배인 1,700억원의 수주를 따내는 등 신시장 개척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국내 업계 전반적으로는 해외 시장에서 고전하는 양상이다. 이렇다 보니 한국전력의 국제 입찰에 대한 국내 업계의 볼멘소리도 적지 않다. 공기업인 한전이 경영난을 빌미로 경제 논리에만 치우쳐 주요 프로젝트의 외국 기업 입찰을 유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전력망 사업이 국가 인프라임에도 자국 업체 배려가 없다”며 “탈원전 등으로 적자가 커지고 있는 한전이 국내 업체와 해외 업체 간 최저가 입찰로 수주 경쟁을 부추기면서 국내 업체들이 밀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서남해 풍력발전단지 해저 케이블 공사에서는 일본의 스미토모가 국내 중소 시공업체인 해천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LS전선, 프리즈미안(이탈리아) 등을 누르고 수주를 따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해천이 손해를 보고 이득은 스미토모가 다 가져갔다는 말이 돌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제 입찰로 가격 경쟁을 시킨 결과가 국부 유출로 이어지기도 한다”며 “우리의 에너지 주권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선 시장의 해외 개방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거 같다”고 우려했다. 다른 관계자도 “한전이 국내 기업들의 해외 수주를 이유로 국내 시장의 개방을 말하지만, 국내 기업들이 수주하는 국가는 해당 제품을 만들 기업이 없거나 프로젝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분할 발주하는 게 대부분”이라며 “전 세계에서 345kV급 이상의 케이블을 만들 수 있는 국가가 한국을 빼면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일본 정도라는 점에서 기업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만든 기술력을 한전이 깎아 먹는 것이 아닌지 더 살펴봤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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