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드나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만 보면 디지털 혁신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최소 5년 정도 뒤처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매운동만으로는 이길 수 없고 (디지털 혁신을) 더 잘해야 일본을 이길 수 있습니다.”
손부한(56·사진) 세일즈포스코리아 대표는 11일 서울 남대문로5가 ‘위워크 서울스퀘어’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같이 강조했다. 사실상 유니클로를 염두에 둔 얘기였다. 유니클로에 솔루션을 팔아야 하는 ‘을’의 위치인데다 유니클로가 잘했다는 말이 자칫 국내 고객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건 아닌지 염려할 법도 하지만, 또렷한 그의 음성에서는 한국 기업과 산업을 걱정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유니클로는 익히 알려진 대로 세계적인 디지털 혁신 우수 사례로 꼽힌다. 일찌감치 2017년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을 적용해 제품 기획부터 생산, 판매에 이르는 시간을 2주 내로 단축하고 재고를 최소화하며 고속성장의 토대를 닦았다. 여기에 어느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까지 갖추며 세계 의류시장을 잠식했다. 비록 한국에서는 한일관계 악화로 불매운동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외교적 이슈가 발생하기 전 유니클로가 국내 소비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손 대표가 지적하는 점도 이 대목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극일(克日)’에 닿으려면 브랜드 한두 개를 국내 시장에서 내쫓는 것이 아니라 국내 기업 고유의 경쟁력으로 일본을 앞질러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니클로의 디지털 혁신은 곱씹어볼 만하다. 유니클로뿐 아니라 일본 산업계의 디지털 혁신은 우리를 훨씬 앞서 가고 있다. 손 대표는 “농업은 디지털 혁신과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일본의 농기계 회사 ‘구보다’는 사물인터넷(IoT)을 기계에 탑재해 제품 생산부터 고객 관리까지 모두 디지털로 진행 중”이라며 “이미 수년 전부터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산업과 경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극일’보다 더 시급한 것이 중국을 견제하는 일이다. 손 대표는 “중국은 네트워크만 놓고 보면 외부 세계와 큰 장벽을 쳐놓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사실상 규제가 없다시피 해 알리바바 등 수많은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넓은 시장을 토대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웃 나라이자 글로벌 시장의 경쟁자인 일본과 중국이 빠르게 디지털 혁신에 나서는 광경을 바라보는 손 대표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디지털 혁신’을 외치고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한 빅데이터와 AI·머신러닝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 이유로 손 대표는 방향성과 절실함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디지털 혁신은 생존이자 지속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데 국내 기업들이 고민은 하지만 여전히 과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제품 기획부터 생산, 판매, 영업, 고객과 재고 관리 등 각 분야에서 이미 사내 전문가로 꼽히는 기존 인력들로서는 새로운 기술 도입이 곧 스스로 존재 가치와 충돌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자본이 투입되고 당장 효과가 드러나지 않는 디지털 전환을 기업 소유자가 아닌 ‘월급쟁이’ 최고경영자(CEO)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쉽지 않은 여건도 무시할 수 없다. 디지털 전환이 마치 도깨비가 요술방망이를 두드리듯 ‘도입’ 결정만 하면 자동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 역시 걸림돌 중 하나다. 손 대표는 “디지털 혁신을 하기 전에 우리 기업이 처한 상황과 디지털 혁신을 통해 어떤 기업으로 성장할지 비전을 확실하게 잡아야 하는데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결국 모든 장애 요인은 여전히 절실함과 긴박함이 부족한 데서 비롯했다고 그는 바라봤다.
그러는 새 경쟁국들의 디지털 혁신과 그 결과물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른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부진은 이미 수년 전에 예상할 수 있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세계적인 경영 성공 사례로 추앙받던 월마트의 위세가 아마존으로 넘어간 게 벌써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국내 기업들은 신선 배송이나 단시간 내 배송, 해외 직접구매(직구) 같은 유통·소비 트렌드의 변화를 지켜보면서도 기존 체제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디지털 혁신의 전환에 뒤처졌다는 것이다. 손 대표는 “최소 5년 전에도 국내 기업들이 대응을 시작할 수 있었다”며 “그 당시는 워낙 호황을 누리던 때라 절박할 수 없었고 이제는 비슷한 새 물결이 다른 산업군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26년 전인 199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떠올렸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메시지로 유명한 당시 삼성의 혁신은 지금 세계 수준의 반도체와 스마트폰 기업으로 도약하는 토대가 됐다. 서울대 조선공학과(현 조선해양공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1986년 대우조선해양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손 대표는 처음 조선 관련 프로그래밍 개발과 로보틱스에 관심을 가지며 IT에 발을 담근 뒤 1991년부터 4년간 휴렛팩커드(HP)코리아 삼성 전사적자원관리(ERP) 프로젝트 리더로 일하며 전환 작업을 지켜봤다. 당시 기업들은 프로세스혁신(PI)이라는 이름 아래 IT를 재고관리 정도에만 적용하던 것을 업무 전반에 도입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손 대표는 삼성에서 시작한 혁신이 다른 주요 대기업으로 확산하는 과정에 액센추어·SAP 등 글로벌 하드웨어(HW)와 소프트웨어(SW), 컨설팅 업체에서 일하며 국내 기업의 ERP 도입 업무를 맡았다. 손 대표가 과거 가장 즐겁게 일했던 시기로 SAP코리아 영업총괄 부사장을 지낸 2008~2014년을 꼽는 것도 금융위기를 겪으며 국내 기업들의 생산성·효율성 향상이 최대 목표로 떠올랐고 ERP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근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 디지털 전환기를 맞아 손 대표는 당시와 지금의 공통점을 혁신 가치에서 찾는다. 그는 “삼성전자는 PI의 3대 축으로 일하는 방식(process)과 사람(people), 제품(product) 등 3개의 ‘P’를 제시했는데, 그 항목은 지금 적용해도 똑같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과거 산업의 변화가 10~20년에 걸쳐 천천히 이뤄졌다면 지금은 1~2년이면 끝난다는 게 가장 큰 차이”라며 시급함에도 무게를 뒀다. 당시 ERP 도입 등 전환의 씨앗이 소니 등 일본 기업을 따라 하는 추종자 전략에서 주도자로 바꾸는 토대가 됐듯, 한국도 지금의 디지털 혁신 단계를 잘 넘긴다면 충분히 기회가 찾아올 수 있다고 그는 전망했다.
손 대표는 전형적인 영업형 CEO로 통한다. 주로 외국계에만 몸담아온 그가 4~5년 주기로 회사를 옮겨가며 승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기술 지식을 바탕으로 고객사인 국내 기업 주요 결정자들과 끈끈한 유대관계로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국내 주요 대기업의 전현직 고위직들과도 여전히 친분을 자랑하며 사적인 만남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세일즈포스가 디지털혁신이 본격화하는 한국 시장을 겨냥해 그를 낙점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법인 대표는 성격에 따라 본인의 경영 자율성이 제한적일 수 있지만 영업 전문가인 손 대표의 위치는 다르다. 그는 “해외 법인의 국내 대표 변호사나 재무 담당 출신이라면 관리에 초점을 두지만 영업 전문가인 경우 사업 확장의 책임을 진 셈”이라며 “본사에 적극적으로 투자 요청도 하고 재량권도 많이 얻어올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세일즈포스는 국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세계 500대 기업 중 240위로 전 세계 3만5,000명의 직원을 둔 글로벌 기업이다. 고객관계관리(CRM) 솔루션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 기업으로, 미국 포춘지 선정 100대 기업 중 99개 기업이 세일즈포스 플랫폼을 사용할 정도로 기업간거래(B2B) 분야의 강자로 꼽힌다. 손 대표는 “디지털 전환에서 한국이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파트너로서 함께 성장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임진혁기자 liberal@sedaily.com
용어설명
◇디지털 혁신(digital transformation)=기업에서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솔루션 등 정보통신기술(ICT)을 플랫폼으로 구축·활용해 기존의 전통적인 운영방식과 서비스 등을 혁신하는 것
[He is]
△1963년 충남 태안 △1986년 서울대 조선공학 학사 △1986~1991년 대우조선해양 R&D 엔지니어 △1991~1994년 HP코리아 삼성 ERP 프로젝트 리더 △1995~1999년 액센추어 PI & SAP 도입 컨설턴트 △2000~2004년 i2테크놀로지코리아 영업 총괄 부사장 △2004~2006년 비즈니스오브젝트(현 SAP) 한국지사 대표 △2006~2007년 머큐리인터액티브코리아 대표 △2007~ 2008년 HP코리아 SW 영업 총괄 △2008~ 2014년 SAP코리아 영업 총괄 부사장 △2014~ 2018년 아카마이코리아 대표 △2019년~ 세일즈포스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