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종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단행한 후 처음으로 액화 불화수소 수출을 허가했다. 이로써 제재 대상에 올랐던 모든 소재가 소량이지만 국내에 들어오게 된다. 이번주 한일 양국이 수출규제를 놓고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맞붙을 예정인 가운데 자국 조치가 자유무역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17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최근 자국 화학소재 생산업체인 ‘스텔라케미파’의 대(對)한국 액체 불화수소 수출 허가 요청을 허가한다고 통보했다. 액체 불화수소의 대한국 수출 허가는 지난 7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 발표 이후 4개월여 만이다. 일본은 3대 수출규제 품목이었던 포토레지스트와 폴리이미드·불화수소 가운데 유독 액체 불화수소에 대해서는 수출 승인을 내어주지 않았다.
일본은 이번 수출 허가 사례 등을 인용해 WTO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조치가 수출 관리를 강화하는 것일 뿐 수출 자체를 틀어막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우리 정부는 그간 일본의 수출규제가 사실상 금수 조치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해왔다. 일본이 규정한 수출 심사기한은 90일, 기한을 한참 넘겨서까지 수출을 허용하지 않는 품목이 있다면 일본의 주장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를 의식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액체 불화수소 수출을 허용함으로써 명목상 모든 품목에 대한 수출을 지속하고 있음을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한일 양국은 19일 WTO에서 제2차 양자회담을 앞두고 있다. 양자회담이 최종적으로 결렬되면 한국은 언제든 패널 설치를 요청할 수 있고 이어 법리 다툼을 진행하게 된다. 한 통상 전문가는 “본격적인 법리 다툼을 앞두고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수출을 규제한 여파가 자국 기업 실적 폭락이라는 부메랑이 된 점도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고순도 불화수소 세계시장의 70%를 차지하는 스텔라케미파의 지난 3·4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1%, 88% 급감했다. 국내 기업의 소재 국산화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국 기업들은 국산 액체 불화수소를 반도체 공정에 투입해 시험 가동하는 등 빠른 시일 내에 액체 불화수소를 대체하기 위한 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출 허가가 누적될수록 기업 입장에서는 ‘이러다가 규제가 점점 풀리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것”이라며 “국산화를 준비하던 국내 수요 공급 기업의 동력이 시들해질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의식했다는 시각도 있다. 지소미아 종료에 반발하는 일본이 한국과 협상을 위해 수출규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수출규제를 해제해야 지소미아 연장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일본의 태도 변화가 없으면 지소미아는 예정대로 오는 23일 0시를 기해 효력을 잃는다. 다만 정부 관계자는 “수출 허가 물량 자체도 극히 미미해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고 일본 정부의 분위기가 달라지지도 않았다”며 “현시점에서 지소미아와 연관 짓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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