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예금’의 독주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 증시 반등과 기업의 자금 수요 증가로 일시적으로 빠져나간 은행 예금 잔액이 올해 1월 다시 늘었다. 대외 경제의 불확실성 확대와 국내 경기 부진 등으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중 자금의 은행 쏠림 현상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계속될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으로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해지면서 안전자산으로 자금 이동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은행들이 앞다퉈 내놓는 특판상품도 한몫한다. 조금이라도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금리 특판상품은 나오기가 무섭게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초저금리 시대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불황과 변동성 확대, 금융·투자와 관련한 각종 규제까지 더해지며 우대 금리를 찾아 나서는 금리 노마드 현상은 더욱 뚜렷해지는 양상이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KB국민·우리·하나·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1월 기준 정기 예금 잔액은 647조3,449억원으로 전월 대비 1조2,639억원(0.20%) 증가했다. 지난해 1월과 견줘보면 41조7,975억원(6.9%)이 증가했다. 은행 전체적으로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지난해 9월 말 예금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753조400억원으로 전년 동기에 대비해 72조1,000억원(10.6%) 증가했다. 지난 2018년 3·4분기 이후 5분기 연속 두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정기 예금의 증가세는 최근의 경기 부진과 맞물려 있다.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안전자산에 돈을 넣어두자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기업 실적이 일제히 악화된데다 미중 무역협상의 진행 상황에 따라 증시가 출렁거리자 투자 타이밍을 노리기도 쉽지 않았다. 코로나19도 기름을 부었다. 글로벌 경제 위축으로 대내외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자 투자처를 잃은 ‘피난자금’은 은행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확실한 투자처를 찾기 전에는 위험성이 큰 상품보다는 무조건 안전한 은행 예금을 선호하는 경향이 더 커진 것 같다”며 “은행을 안정적인 투자처라고 생각하는 수요층이 더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와 라임 사태까지 더해지면서 투자심리가 얼어붙은 영향도 크다”고 덧붙였다.
물론 안전자산을 택하는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금리 갈증’ 현상은 뚜렷하다. 최근 하나은행이 내놓은 ‘하나 더 적금’의 흥행 사례가 방증이다. 연 최대 5.01% 금리 조건을 내걸어 3일간 한정 판매한 결과 136만7,000명이 가입했다. 말 그대로 흥행 ‘돌풍’이었다. 월 불입액 30만원, 가입기간 12개월로 제한한데다 단리 방식인 탓에 한도를 채워 불입해도 실제 수령 이자는 8만원가량. 그럼에도 적금 가입자가 몰리면서 하나은행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은 한때 접속 대기자가 5만명을 넘어서며 접속이 지연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 같은 ‘금리 갈증’ 현상은 지난해 7월 카카오뱅크가 출시한 연 5% 금리 정기예금의 ‘1초 완판’ 사례에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또 연초 우리은행의 ‘우리고객님 고맙습니다’ 정기예금도 1조원 한도가 단 6일 만에 완판됐다. 금리 수준은 연 1.90%이지만 가입기간 2년 중 1년만 유지해도 2년 예금 금리에 해당하는 이자를 주도록 설계, 금리 우대 문턱이 비교적 낮다는 점에서 고객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른 시중은행들도 고객들의 금리 갈증을 해결해줄 특판 상품 출시에 나서고 있다. 농협은행은 다음 달 금리 혜택을 확대한 디지털 전용 특판 상품을 준비 중이다. 또 신한은행은 매년 프로야구 시즌에 맞춰 선보인 예금 상품의 금리 혜택을 높이기 위해 상품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은행의 특판상품은 새로운 예대율 적용에 따라 은행들이 여전히 예금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화된 신예대율을 맞추기 위해 은행권에서는 지난해부터 꾸준히 예금 유치와 커버드본드 발행 등에 집중했다. 특히 당국의 커버드본드 발행 장려 정책에 따라 원화 커버드본드 발행잔액의 예수금 인정 비율을 기존 1%에서 3% 수준으로 인상하는 방안이 논의됐지만 관련 논의가 지지부진하면서 예금 유치 전략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지난해 두 차례 기준금리 인하에도 시중은행들은 적극적으로 예금금리 인하에 나서지 못했다. 예금금리 인하로 예금잔액이 빠져나갈 것을 우려해서다.
김현섭 국민은행 도곡스타PB센터 PB팀장은 “연초 주식 등 위험자산으로 자금흐름 반전이 감지된 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금융·투자의 심리가 전반적으로 크게 위축돼있는 상황에서 정기예금 등으로 자금이 몰리는 추세는 한동안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송종호기자 joist1894@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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