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등급의 회사채마저 발행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6월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기업어음(CP)·전단채(전자단기사채) 물량은 60조원에 육박합니다. 미국·유럽연합 등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얼마나 빨리 진정시키느냐가 가늠자이겠지만 결국 우리 정부가 펼칠 우산의 크기에 따라 기업이 겪을 위기의 정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22일 “국내보다는 해외발 퍼펙트스톰이 몰려오는 형국인데 자금경색을 막을 방파제를 최대한 높이 쌓고 그저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기업이 상반기까지 필요로 할 60조원 이상의 자금을 투하할 준비를 하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여차하면 기업들에 직접 자금을 공급할 정도의 큰 우산을 준비해야 하고 그런 신호를 줘야 자금시장도 안정될 것이라는 얘기다.
규모와 상관없이 기업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상당하다고 한다. 4월부터 6월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는 14조4,500억원(금융투자협회)에 달한다. 이 가운데 4월은 6조5,500억원으로 월별로는 최대다. 신용 리스크를 겪고 있는 ‘BBB+’급 이하 물량만 17%다. 약 1조원에 달하는 회사채에 부도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시장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대한항공(003490)(2,400억원)과 두산중공업(034020)(6,000억원·외화사채)의 만기가 모두 4월 중 돌아온다. 두 기업 모두 외부 요인에 따라 현금창출 능력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에서 신규 회사채 발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져 자금난에 노출된 셈이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회사채를 상환하는 방법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만기가 짧아 선호하지 않는다. 대한항공은 이달 중 6,000억원 규모의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해 ‘급한 불’을 끄는 방안을 추진할 정도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초우량으로 분류되는 하나은행과 포스코 계열사 포스파워가 사채 발행이 삐끗한 것을 시장은 안 좋은 신호로 해석한다”면서 “일부 기업들은 꺼리는 단기채로 자금을 조달하거나 금리를 더 얹어 해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의 단기자금 조달 수단인 CP나 전단채의 상황은 더 좋지 않다. 6월까지 만기물량은 42조4,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4월 만기인 19조2,700억원 규모의 CP 중 신용등급이 A2- 이하인 비우량 채권은 7조3,400억원에 달한다. 금융감독당국이 CP를 중심으로 한 단기자금시장의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이유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도 “신용위기와 자금난이 동시에 겹치면 이들 기업이 가장 먼저 유동성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금시장이 경색되면 단기자금 조달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금리는 더 높아진다. 그런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16일 1.53%를 기록한 CP금리는 한국은행이 금리인하를 단행한 이튿날 1.36%으로 17bp(1bp=0.01%포인트) 떨어졌다가 3일 만에 다시 1.46%으로 상승 마감했다. 대부분 단기 자금은 롤오버(차환)되는 물량이지만 일부 기관들이 회사채, PF대출 등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보증CP의 신규 매입을 꺼리면서 시장의 이상 징후가 뚜렷해지는 분위기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공모시장을 포기하고 사모시장을 찾아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이 최근 회사채 시장에서 사실상 철수하려는 조짐을 보이면서 공모 시장에서는 원하는 수준의 자금 모집이 어려워진 탓이다. ‘AA’급인 신세계가 지난 20일 1,000억원어치의 사모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고 ‘A’등급인 HDC현대산업개발도 3일 1,700억원 규모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자금을 확보했다. 올해 초 4,000억원 규모의 공모채 모집에서 1조원이 넘는 뭉칫돈을 쓸어모은 호텔롯데(AA)도 지난달 15년 만기 사모채를 1,200억원어치 발행했다.
더 큰 문제는 현재 관광·항공·호텔·소매산업 등을 덮친 코로나19 사태의 여파가 전(全) 산업으로 옮겨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코로나19 사태가 6개월 이상 장기화할 경우 국내 대기업 매출이 평균 8%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업종 별로 보면 자동차(-13.9%), 석유제품(-12.4%), 일반기계(-11%)의 타격이 클 것으로 봤다. 경기 하락에 따라 제조업까지 조업 차질이 불가피해진다는 것이다. 이 경우 회사채 금리와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기업 신용등급이 줄줄이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말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등의 신용등급을 한 계단씩 내린 바 있으며 무디스도 이마트와 롯데쇼핑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김민경·서일범·한동희기자 mk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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