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051910)이 SK이노베이션(096770)을 상대로 제기한 전기차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소송에서 SK이노베이션이 조기패소한 이유가 공개됐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오는 10월 최종결정에서 이를 확정하면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배터리 사업이 타격을 입는 만큼 합의를 위한 물밑 작업이 예상되지만 증거 인멸로 인해 협상이 난항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SK이노, 증거인멸로 법정모독”=미 ITC는 21일(현지시각)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 결정을 내린 판결문을 공개했다. ITC는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 및 ITC의 포렌식 명령 위반에 따른 법정모독 행위를 고려할 때 LG화학의 조기패소 판결 신청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이 소송 사실을 인지해 증거보존의무가 발생한 지난해 4월30일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문서를 삭제하거나 삭제되도록 방관했다는 것이 ITC의 판단이다. ITC는 “증거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에서 전직한 직원들의 배터리 기술 지식을 활용하고 적용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며 “채용 과정에서부터 지원자들로부터 구체적인 정보를 취득해 관련 부서에 전달하는 등 경쟁사 정보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조직 차원에서 전사적으로 이뤄졌고 법적 문제 발생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봤다.
특히 ITC는 “SK이노베이션은 문서삭제가 범행 의도 없이 통상적인 업무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서삭제를 위해 발송된 지시 내용까지 없애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증거에 따르면 문서보안점검의 실제 목적은 LG화학 관련 정보를 포함한 문서를 제거하거나 진짜 필요한 문서일 경우 문서명 또는 내용을 변경해 LG화학이 찾기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SK이노베이션의 증거 인멸과 포렌식 명령 위반으로 인한 법정모독 탓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면서 “LG화학은 물론 판사도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재판을 진행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적합한 법적제재는 오직 조기패소 판결뿐”이라고 결론 냈다. 그러면서 ITC는 이번 결정이 “당사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뿐 아니라 다른 사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디스커버리 위반 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소송 남은 절차는=SK이노베이션이 지난 3일 이의를 제기하면서 ITC는 다음달 17일까지 수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ITC가 SK이노베이션의 신청을 받아들이면 오는 10월까지 미국 관세법 337조 위반 여부를 다시 판단하고,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구제조치와 공탁금에 대한 결정만 내린다. 미국 관세법 337조는 지식재산권 침해와 같은 무역에서의 불공정행위를 제재하는 규정이다.
다만 ITC가 통계를 집계한 이후 모든 영업비밀 침해 소송 사건에서 ITC의 예비결정이 최종결정으로 유지됐다. 최종결정에 따라 오는 10월부터 SK이노베이션의 관련 제품이 수입 금지되고 2022년 양산을 목표로 한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이 중단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SK이노베이션은 ITC가 최종결정을 내리는 10월 전까지 LG화학에 합의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합의의 관건은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로 입은 피해와 배상금액을 어떻게 정하느냐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의 증거 인멸로 피해를 산정하기조차 어려워졌다는 것이 LG화학 측의 시각이다.
실제 ITC는 피해 규모와 관련해 “삭제돼서 제출되지 못한 문서의 이름만 봐도 이 문서들이 피해 입증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보인다”며 “문제는 SK이노베이션이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문서를 삭제해 완전한 사실관계 자료의 확보 자체를 방해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효정기자 j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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