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남동 120호분. 이름도 없이 숫자로 불리는 이 신라 시대 고분은 사적 제512호로 지정된 경주 대릉원 일원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120호분은 일제강점기 때 번호가 붙었을 뿐 별다른 연구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됐다. 1956년 경 촬영된 사진에서는 봉분 위에 떡하니 초가 3채가 들어앉았고, 1977년 사진에서는 슬레이트 건물과 주택들 여러 채가 고분 주변을 뒤덮었다. 그렇게 자칫 사라질 뻔한 신라 고분이 빛을 봤다.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지난 2018년 5월부터 120호분의 잔존 유무와 범위 등을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에 착수했고, 지난해 조사 과정에서 이것이 하나의 무덤이 아니며 북쪽에 120-1호분, 남쪽에 120-2호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그리고 지난 15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진행하던 경주 황남동 120호분 발굴 현장에서 파르스름한 금동 유물의 둥근 곡면이 발견됐다. 조심스레 흙을 제거하자 표면에 ‘T’자 모양의 무늬가 뚫린 금동 신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1,500년의 묻혔던 역사를 암시하는 푸른 녹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망자의 발에 신겨 장례 때 사용하던 장송 의례(葬送儀禮)용 신발이 분명했다.
도시 전체가 보고(寶庫)인 경주의 황남동 120호분에서 1,500년 전의 금동 신발이 출토됐다.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 금동 신발이 출토된 것은 1977년 경주 인왕동 고분군 조사 이후 43년만이다.
문화재청은 27일 경주시가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추진 중인 ‘경주 황남동 120호분’ 조사에서 금동 신발과 허리띠 장식용 은판, 각종 말갖춤 장식 등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아직 발굴조사의 초기 단계지만 금동 신발 등 출토 유물의 중요성을 고려해 문화재청은 이날 언론간담회를 열고 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다행히 120호분은 훼손 없이 무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화강암이 풍화해 생긴 모래인 마사토를 이용한 점이 특별했다.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중에 귀한 마사토로 축조한 사례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동신발은 경주 황남대총 외에 노동동 식리총에서도 발견됐는데, 식리(飾履)는 금동신발의 한자어다. 백제를 대표하는 무령왕릉에서도 왕과 왕비의 금동신발이 출토되는 등 삼국시대의 왕릉급 무덤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금동신발이 여럿 발견됐다.
가장 주목을 끈 금동신발 외에도 수습된 유물의 면면이 화려하고 다채롭다. 금동신발에 둥근 모양의 금동 달개(瓔珞·영락)가 달려 있었는데,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도 금동 달개가 드러나는 금속 유물이 발견됐다. 연구원 측은 “이 달개가 머리에 쓰는 관이나 관 꾸미개(관식)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의 발굴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해 ‘금동관’의 존재를 기대하게 했다. 부장품으로 금동 말안장(안교)과 금동 말띠꾸미개(운주)를 비롯한 각종 마구 장식도 출토돼 피장자가 왕족이나 귀족 등 상당히 높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청동 다리미, 쇠솥을 비롯한 다양한 토기류 등이 발굴됐다.
이번 발굴은 120-1호와 120-2호분, 즉 120호분의 주변 고분을 조사한 것으로 규모가 훨씬 더 큰 120호분을 본격적으로 발굴하면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보다 위계가 더 높은 유물이 출토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게 연구원 측의 설명이다.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의 이름을 따 ‘천마총’ ‘무용총’ 등의 이름이 붙는 것을 고려할 때 이번 발굴의 성과인 ‘금동신발’이나 추후 발굴될 유물이 황남동 120호분의 이름도 결정지을 전망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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