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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원초적 사랑, 끝없는 예술의 원천이 되다

[김영나의 미술로 보는 시대]

예술의 가장 전통적 주제 러브스토리(끝)

아리아드네-테세우스·아폴로-다프네 등

서양 사랑 이야기의 원천은 그리스 신화

1787년 이탈리아 조각가 카노바가 만든

에로스·프시케 주제 작품 가장 아름다워

빅토리아 시대까지는 가정적 여성 강조

19세기 말부터 전통적 관습·억압 풀어져

작품 주제로 '키스'가 많이 등장하기 시작

현대미술선 개인적인 경험 주로 작품화

안토니오 카노바의 1787년작 ‘프시케, 에로스의 키스로 다시 살아나다’, 루브르박물관 소장.




예술에서 가장 전통적인 주제의 하나는 사랑이다. 특히 남녀의 사랑은 비단 미술뿐 아니라 문학, 영화, 음악의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상상을 이끌어낸다. 행복한 결말로 끝나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주건 간에 사랑이라는 것은 열정, 환희, 슬픔 등 복잡한 심리가 동반되는 주제이며 인간의 존재에 생기를 주는 불가결한 감정이다. 서양의 경우 사랑과 관계되는 많은 이야기의 원천은 그리스 신화인데, 슬프거나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아킬레우스와 펜테실레이아, 아폴로와 다프네, 갈라테이아와 에이시스(또는 아키스) 신화의 주제는 모두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가장 인기 있는 러브 스토리는 에로스(영어로 큐피드)와 프시케(영어로 사이키) 이야기다. 이 주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조각은 1787년에 이탈리아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가 제작한 ‘프시케, 에로스에 의해 다시 살아나다’가 아닐까 한다. 그 내용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자신의 아들 에로스가 아름다운 공주 프시케와 사랑에 빠진 것을 보고 질투심이 나 프시케를 여러 가지 시험에 들게 한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시험에서 호기심 때문에 보지 말아야 할 상자의 문을 열어 죽음의 잠에 빠진 프시케는 에로스의 키스로 다시 살아나 결국 사랑을 이루게 된다. 18세기 후반, 당대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칭송받았던 카노바는 날개 달린 에로스가 잠에서 깨어나는 프시케를 부드럽게 일으켜주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두 인물의 팔과 다리가 X 형태의 구성을 이루면서 그 중앙에 있는 연인들의 두 얼굴 표정은 감미로운 사랑의 절정이다. 감각적인 신체가 서로 교차돼 대리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왜 카노바가 인체의 미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미술가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카노바 자신은 한때 약혼했다 파혼한 일은 있지만 생전 어느 여자와도 관계를 유지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상상의 사랑이 실제 사랑보다 더 황홀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앙투안 지로데의 1791년작 ‘엔디미온의 잠’, 루브르박물관 소장.


비너스 여신의 아들이면서 사랑의 신인 에로스는 늘 사랑의 장면에 등장한다. 에로스가 나타난 또 다른 매혹적인 작품은 1791년 프랑스의 앙투안 지로데가 그린 ‘엔디미온의 잠’이다. 엔디미온은 달의 여신 셀레네가 사랑한 미소년이었다. 여신은 엔디미온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를 영원한 잠에 빠뜨려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게 했다. 어둡지만 부드러운 월광은 달의 여신 셀레네를 상징한다.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엔디미온은 의식이 없이, 수동적이며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다. 이제까지의 미술에서 주로 영웅적인 신체로 등장했던 남성이 이 그림에서는 수동적이다. 여성의 보다 적극적인 사랑과 구애는 이미 이 시기에 남녀의 젠더 개념에 변화가 있음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달의 여신은 월광으로만 드러나고 있는 데 비해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사랑의 신 에로스(큐피드)의 존재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실제 신화의 이야기보다는 에로스와 엔디미온과의 은밀한 성관계, 남성의 남성에 대한 시각적 욕망, 즉 동성애적인 사랑을 암시받는다. 동성애적인 표현은 이미 그리스 미술에서부터 있었고, 17세기의 화가 카라바조는 이와 연관된 여러 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등 완전히 금지된 표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성애자는 시민의 책임을 거부한 남성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계몽주의 철학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큰 변화가 일어난 18세기 말에는 이러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1907~08년작 ‘키스’, 벨베데레미술관 소장


남녀의 사랑과 관계에 대한 관습과 억압이 풀어지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19세기 중반의 빅토리아 시대만 해도 가정적 여성이 강조되고 대중매체나 문학, 미술에서도 타락한 여성이 비극적인 삶을 맞이하는 이야기들이 많았으나 19세기 말에는 완연한 변화의 기미가 보인다. 이 무렵 특히 많은 미술가들의 주제로 등장하는 것이 ‘키스’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1907~08년에 그린 ‘키스’에서 두 남녀는 화가 자신과 그의 연인 에밀리 플뢰게를 나타낸다고 해석된다. 클림트와 에밀리의 관계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같이 찍은 많은 사진들과 남아 있는 서신으로 보아 아마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녀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신체의 다른 부분은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패턴으로 처리됐다. 여성은 작은 소용돌이 문양의 장식으로, 남성은 기하학적 사각형의 패턴으로 결합돼 육체적인 감미로움과 황홀감을 시사한다. 클림트는 유화에 반짝이는 금 잎, 백금 등을 함께 사용했는데 화려한 비잔틴적 분위기의 금빛과 모자이크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이것은 그가 1903년에 방문했던 라벤나에 있는 비잔틴 미술의 대표적 모자이크인 산 비탈레 교회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왕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오귀스트 로댕의 1901~04년작 ‘키스’, 테이트미술관 소장.




보는 사람에 따라 클림트의 정교한 장식성이 실제 숨 쉬고 욕망을 느끼는 인간의 체취를 제한시켰다고 느낀다면, 동시대에 활약한 오귀스트 로댕의 ‘키스’(1901~04년)에서는 클림트보다 인간적인 욕망과 열정이, 카노바보다는 원초적 인간의 본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로댕의 ‘키스’는 원래 그의 야심작이었던 파리 장식미술관 청동문인 ‘지옥문’ 프로젝트에 있던 주제였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 나오는 인물들로 지옥문을 구상했는데, ‘키스’는 그중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로 설정됐다. 프란체스카는 실제 역사적인 인물로 남편의 동생인 파올로와 사랑에 빠져 첫 키스를 하다 남편에게 발각돼 죽는 여성이다. 그러나 곧 로댕은 ‘키스’가 너무 감각적이고 비극적인 감정이 결여돼 지옥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하나의 독립 작품으로 제작했다. 이 독립된 작품에서는 ‘신곡’과 전혀 상관없는 일반화된 남과 여로 받아들이게 된다.

로댕은 대리석으로 제작한 ‘키스’를 완전하게 다듬은 작품으로 만들지 않고 거친 돌 부분을 그대로 두었기에 거친 질감이 신체의 녹아드는 부드러운 질감과 대조를 이룬다. 남녀의 관계는 매우 유기적이며 형체의 움직임이 암시돼 있다. 근육질 남자의 커다란 손은 점잖고 부드러우며, 감각적인 신체의 수줍은 여성을 안아준다. 섬세하면서도 강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남녀의 열정을 표현한 이 작품에서는 정신적이면서 심리적인, 자제와 욕망이 함께 느껴진다.

로버트 인디아나의 1966년작 ‘러브(LOVE)’


현대미술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되 신화나 문학에서 소재를 찾지 않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작품화 했던 화가로는 샤갈이나 코코슈카 등이 있다. 그런데 로버트 인디아나의 ‘러브(Love)’에서는 더 이상 남녀의 사랑이 주제가 아니다. 이 작품을 제작한 1966년은 도시 곳곳에서 광고, 표지, 상표가 범람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는 이러한 상업적 디자인에서 많이 사용하던 문자체인 ‘LOVE’를 빨강으로, 배경은 파랑과 초록으로 처리하고 ‘O’를 기울어지게 했다. 빨강, 초록, 파란색은 서로 밀고 당기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강렬한 대조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주제이면서도 통속적이기도 한 ‘LOVE’를 당시 히피 문화를 상징하는 자유로운 사랑으로 받아들였고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원래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서 크리스마스카드로 발행할 예정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그 후 여러 도시에서 대형 조형물로 설치됐다. 로버트 인디아나 자신은 이 작품이 어린 시절 교회에서 보았던 ‘GOD IS LOVE’라는 글귀에서 비롯했다며 자전적이면서 종교적인 ‘사랑’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술사학자·前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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