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가 ‘팹리스(반도체 위탁생산)의 팹리스’라 불리는 영국 ARM을 인수할까.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가 수십조 원을 들여 만든 ‘공유경제’ 생태계가 최근 빠르게 몰락하며, 소프트뱅크가 지분 100%를 소유한 ARM 매각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소프트뱅크는 지난 2016년 약 40조원에 ARM 지분 100%를 확보한 바 있다. 손 회장은 지난 2016년 ARM 인수 당시 “바둑으로 치면 50수 앞을 내다보고 인생 최대의 베팅을 했다”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손정의 회장이 지난해 한국에서 회동해 AI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눈 것 또한 이 같은 관측의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ARM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고 보고 있다. 이유는 △개방성에 근거한 ARM의 수익모델 △소프트뱅크가 부풀려 놓은 ARM의 몸값 △각 국의 기업결합심사 장벽 등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
AP사업자의 ARM 독점.. 모바일 칩 생태계 깨져 |
2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ARM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제작하는 팹리스를 대상으로 지적재산권(IP)을 팔아 수익을 내고 있다. 애플, 퀄컴, 삼성전자 등은 ARM의 ‘명령어집합체(Instruction Set Architecture·ISA)’를 기반으로 AP에 탑재되는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개발한다. 삼성전자도 시스템LSI 사업부에서 반도체 설계를 담당한다. ARM이 ‘팹리스의 팹리스’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 같은 수익 모델은 소규모 인력으로 운영 가능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매출 규모가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 ARM 실적이 마지막으로 대외 공개된 지난 2017년 자료를 보면 매출은 1,524억엔(약 1조7,413억원), 영업이익은 243억엔(약 2,776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ARM의 미래 성장성도 마냥 밝지만은 않다. 손정의 회장은 지난 2016년 ARM 인수 당시 사물인터넷(IoT) 및 인공지능(AI) 시장이 급성장할 것으로 보고 40조원을 베팅했지만 이들 산업의 성장 그래프는 손 회장 예측 대비 완만하다. IoT 등의 핵심인프라인 5세대(G) 이동통신망 구축 작업이 미국의 화웨이 제재와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셧다운으로 지지부진한 탓이다. AI 또한 수년전 머신러닝 기법이 널리 보급되며 ‘퀀텀점프’라 불릴만한 기술 도약을 이뤄냈지만 이후 기술 업그레이드가 지지부진하다. 머신러닝을 위한 빅데이터 확보 문제 외에 머신러닝의 근간이 된 인공신경망 기법에서 추가적인 기술적 퀀텀점프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탓이다.
ARM의 주력인 모바일 칩 시장이 스마트폰 시장 침체로 성장세가 완만하다는 점도 고민이다. A RM은 삼성전자나 화웨이, 애플 등과 달리 자체 AP를 내놓지 않고 일종의 기초 설계도라 할 수 있는 ISA를 판매해 수익을 내 매출 규모가 작다. 최근 애플이 인텔이 아닌 ARM 코어 기반의 CPU가 탑재된 맥북 시리즈를 내놓을 것이라 밝힌 이후 ARM의 생태계가 노트북까지 확대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지만 수익성은 여전히 물음표다.
최소 몸값이 50조원 이상? ARM 거품론 |
ARM 지분이 시장에 나온다 하더라도 손정의 회장 입장에서는 ARM의 몸값으로 최소 50조원 이상은 받아야 체면치레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제 거래가 성사되기 힘들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과 같은 수익 모델로는 50조원이 넘는 돈을 주고 ARM 지분 100%를 매입할 경우 자금 회수가 거의 불가능하다. 현재 수준의 영업이익(약 2,700억원) 규모가 지속된다 가정할 경우 소프트뱅크 입장에서는 150여년이 지나야 투자금액(약 40조원) 회수가 가능하다. 그렇다고 ARM 지분 매입 비용을 메우기 위해 IP 가격을 높이거나 특정 업체에 IP 공급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할 경우, 각 업체가 자체기술 기반 AP제작에 ‘올인’할 가능성이 커 ARM 생태계 자체가 붕괴할 수 있다.
ARM이 글로벌 최대 반도체 수요처인 중국 시장에서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ARM은 지난 2018년 중국 법인을 설립하며 관련 지분의 51%를 중국 정부가 주도하는 투자사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소프트뱅크가 ARM 지분 인수에 거액을 베팅한 만큼 이자비용 충당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로 ARM이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이라는 중국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익 절반은 중국 정부 몫이 됐다.
무엇보다 중국 팹리스 업체들은 ARM의 IP를 기반으로 반도체를 설계 중이지만 ARM 측에 특허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RM의 매출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은 중국의 팹리스들이 ARM에 로열티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손 회장이 2023년 ARM의 재상장을 함께 추진 중이지만 본인이 4년전 지불한 40조원 이상의 몸값을 받을 수 있을 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퀄컴은 독과점 우려로 NXP 인수 실패.. ARM 인수 때도 비슷한 결과 나올 듯 |
특정 기업 인수 추진 시 시장 독과점 가능성이 있을 경우 이에 영향을 받게되는 유럽, 중국, 미국, 일본 등 주요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다. ARM은 모바일 AP의 기초 설계도를 제공하는 만큼 반도체 제작 생태계가 조성된 한국,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주요국가의 관련 당국(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급)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17년도시바의 메모리 사업부(현 키옥시아) 매각 당시 한국과 미국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분 매입에 나선 사례에 비쳐 ARM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매각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다만 미국의 규제로 중국 업체의 컨소시엄 참여가 사실상 불가능한데다 ARM 몸값 거품론이 여전해 실행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ARM 매각=손정의의 빅피쳐 실패? |
IT 업계에서는 손정의 회장의 ‘추락’이 이번 ARM 매각 가능성 제기로 더욱 가속화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손 회장은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미국 이동통신사 티모바일 지분(약 25조원 규모) 매각 작업에 나서는 등 공유경제(위워크, 우버, 그랩 등)·5G(티모바일 등)·사물인터넷(ARM 등) 과 같은 핵심 사업이 줄줄이 좌초하고 있다.
특히 손 회장이 추진한 이들 핵심 사업이 결국 자율주행차로 ‘시너지’를 낼 것이란 전망이 제기 됐지만 이 또한 관련 시장 확장 속도가 지지부진하며 제자리 걸음 중이다. 자율주행차는 스마트폰의 몇십배에 달하는 반도체가 탑재될 전망이며 손 회장 또한 이를 노리고 ARM과 우버 등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다만 자율주행기술은 최근 구글 자회사 웨이모가 고전하고 있듯 기술 도약이 정체돼 있는 대표 분야로 꼽힌다.
현재 자율주행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업체가 손 회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테슬라라는 점도 소프트뱅크 입장에서는 뼈아프다. 지난 2017년 테슬라의 막대한 영업손실에 고전하던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를 비상장 회사로 전환하기 위해 손 회장 측과 접촉했지만, 당시 의결권 등에 대한 이견으로 결국 성사 되지 않았다는 보도가 앞서 나온 바 있다.
손 회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테슬라는 3년 뒤 글로벌 자동차 업체 중 시가 총액 1위에 등극할 정도로 압도적 위상을 자랑한다. 특히 테슬라는 ‘레벨2’ 기술 고도화로 승부를 보고 있어 완전 자율주행 시대 도래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테슬라가 자율주행용 칩 생산에 나서는 한편 위성기반 인터넷 보급 프로젝트 ‘스타링크’를 기반으로 통신망 사업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점도 손정의 회장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이다. 테슬라는 기존 자율주행시스템에는 모빌아이나 엔비디아의 제품을 썼지만 ‘HW3’부터는 삼성전자와 손잡고 자체 생산한 반도체를 탑재중이다. 스타링크는 전세계에 1GB 용량의 데이터를 8초만에 내려받을 수 있는 1Gbps 속도의 통신망 구축을 목표로 한다. 손정의 회장이 공략 하려던 미래차 및 미래 통신 시장 또한 신흥 강자의 등장으로 큰 그림이 어그러진 셈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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