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당초 오는 9월 말까지로 계획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출만기 연장 및 이자상환 유예 조치를 재연장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가운데 금융권에서는 옥석 구분 없이 연명대출만 이어지면 또 한 번의 ‘폭탄 돌리기’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실제 은행들은 올 상반기에만 충당금을 1년 새 3.5배 더 쌓은 것으로 나타났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실여신 비율과 연체율은 하락했지만 정작 은행권은 대규모 부실에 대비해 마이너스 실적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례적으로 많은 충당금을 적립한 것이다. ★관련기사 3면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KB국민·하나·우리은행의 올 상반기 대손충당금을 포함한 신용손실충당금 적립액은 총 1조2,012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3,426억원)에 비하면 3.5배 늘었다. 지난해 상반기에도 1년 만에 5배 넘게 충당금 적립액이 급증했던 것을 감안하면 가파른 증가세다. 은행별로 보면 적게는 1.6배에서 많게는 33배까지 급증했다. 충당금은 대출을 회수하지 못할 상황에 대비해 금융사가 미리 쌓아놓는 비용으로 충당금이 늘면 그만큼 대출부실 위험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특히 이번 조치는 은행들이 건전성 지표가 일제히 개선되는 가운데도 대규모 충당금을 적립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실제 4개 은행의 평균 연체율은 지난해 2·4분기 0.29%에서 올해 0.26%로, 부실여신을 뜻하는 고정이하여신(NPL) 비율은 같은 기간 0.46%에서 0.37%로 하락했다. 현재 은행들은 정부 지침에 따라 연장·유예된 대출과 이자도 장부에서는 각각 정상여신과 이자수익으로 잡아 만기연장 규모만 46조7,000억원에 달하는데도 지표상으로는 코로나19의 여파를 가늠하기 어렵다. 은행들이 ‘깜깜이 상태’라고 자조하는 이유다. A은행 고위관계자는 “만기연장과 상환유예 등으로 현재는 지표가 차주의 실질적 상태와 건전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부실이 현실화하고 나서는 늦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자 못 갚아도 장부엔 정상...카드대란 ‘폭탄돌리기’ 재연될라
대규모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지난 2003년 ‘카드 사태’ 당시 신용카드사들이 공시한 카드대금 연체율은 최고 14%였다. 그 해 11월 LG카드의 유동성 위기가 현실화하기 직전까지도 9~10% 수준을 유지했다. 주요 카드사의 연체율이 1%대에 불과한 지금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높지만 신용불량자가 360만명까지 불어나고 ‘카드 돌려막기’가 횡행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현실과 다소 괴리가 있는 수치다. 실제로 신용평가사들이 당시 내부적으로 추정한 조정연체율은 이미 2003년 초 19%, 2003년 말에는 35%대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연체금을 장기대출로 바꿔주는 ‘대환대출’이 연체율에서 제외되면서 공식 지표가 실질적인 자산 건전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지표의 왜곡은 당시 금융시장의 혼란을 더 가중시킨 요인으로 지목된다.
옥석 구분도 없이 연명대출...금융시장 혼란 가중 우려
중기·소상공인 폐업 여부·상환능력 확인할 방법 없어
“지표 의미 없어져”...연체율 하락에도 방파제 더 높여
금융권 일각에서는 모든 금융사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 중소기업·소상공인에 대해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상환유예를 시행하고 있는 지금도 카드 사태 당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올 상반기 금융권 안팎에서는 코로나19 충격에 따른 실물경기 침체가 연쇄적인 금융부실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았지만 걱정과는 반대로 이 기간 4대 시중은행의 자산 건전성 지표는 일제히 개선됐다. 신한은행의 경우 총여신 대비 부실여신의 비중을 나타내는 고정이하여신(NPL·무수익여신)비율이 지난해 말 0.45%에서 올 6월 말 0.43%로 떨어졌고 KB국민은행은 0.37%에서 0.33%로, 하나은행과 우리은행도 각각 0.39%에서 0.35%, 0.40%에서 0.38%로 개선됐다. 연체율 역시 4대 은행 모두 1년 전에 비해 일제히 낮아졌다.
문제는 이런 지표 개선이 ‘착시효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은행들은 정기적으로 정교한 여신 평가를 거쳐 모든 대출의 신용위험과 회수 가능성 등에 따라 여신을 나눈다. 대출 회수에 문제가 없으면 정상으로 분류되지만 차주가 각종 지원에도 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면 해당 대출은 고정 또는 그 이하 여신으로 평가돼 은행은 더 많은 충당금을 쌓아야 한다. 차주의 현 상황과 돈을 갚을 의지·능력 등을 정기적으로 정확히 평가하는 것이 은행의 여신 건전성 관리 업무의 핵심인 셈이다.
하지만 현재 은행들은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금융규제 유연화 방침에 따라 만기 연장 및 이자 상환유예 중인 여신을 모두 문제가 없는 정상여신으로 분류하고 있다. 6월 말 기준 4대 은행의 만기 연장, 상환유예 규모가 24조7,000억원에 달할 만큼 큰데도 이들 은행의 NPL비율에 타격이 없었던 이유다. 이뿐만 아니라 정부는 차주의 요청에 따라 이자 납입을 미뤄준 대출의 경우에도 은행이 미수이자를 이자수익으로 인식하도록 법령해석을 발급했다. 실제로는 이자를 받고 있지 않지만 장부상으로는 매달 이자를 받고 있는 것처럼 기재된다는 뜻이다. 은행의 이자수익이 줄어들어 자본 적정성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지만 은행의 건전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지금처럼 한계차주의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상환유예를 조건 없이 허용한다면 은행으로서는 해당 중소기업·소상공인이 폐업한 것은 아닌지, 앞으로 상환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은행들이 안정적인 건전성 지표에도 불구하고 1년 만에 충당금을 3.5배 늘려 쌓고 선제적 리스크 관리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B은행 고위관계자는 “하반기에도 경기가 반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며 “만기 연장이 기정사실화돼가는 상황에서 은행으로서는 미리 건전성 관리를 강화하지 않으면 내년 중반께 부실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혁준 나이스신용평가 금융평가본부장은 “차주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지속적으로 대출 기한을 연장해주는 ‘연명대출’은 표면적으로 정상여신이지만 실제로는 부실여신”이라며 “이런 조치가 장기화하면 금융사의 자산 건전성 지표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착시효과에 대한 보완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빈난새기자 binthe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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