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Makers and Takers)라는 책이 있다. 우리 말로 풀어쓰자면 제조업은 ‘(가치를)만드는 자’, 금융은 이 가치를 ‘뺏는 자’ 정도가 된다. 이 말엔 가치 판단이 녹아 있다. 자본주의 태동 이전부터 금융은 늘 뺏는 자로 그려져 왔다. 1598년에 출판된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수전노로 그려진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금융 없이 굴러가지 않는다. 은행의 자금 중개 기능이 없다면 설비투자가 필요한 제조업도, 쓰는 돈과 버는 돈의 시차가 있는 다른 기업도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금융이 2008년처럼 위기의 진원지가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지렛대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얼마나 알고 통제하느냐에 따라 악이 되기도 하고, 선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친절한 IB씨’는 금융의 첨두(尖頭)라 할 수 있는 투자업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획한 코너다.
M&A의 '마술'... 기업 넘어 산업 지형도를 바꾼다 |
투자은행(IB)의 본산답게, 역시 M&A의 시초는 미국이다. 제너럴 일렉트릭(GE), 스탠더드오일, 듀폰, 유에스스틸(U.S. Steel) 등. 지난 20세기 세계를 호령했던 미국 기업은 모두 M&A로 덩치를 키웠다. 단초는 역설적으로 미국 연방정부가 1890년 제정한 최초의 반(反)독점법인 셔면법(Sherman Antitrust Act)이었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종전 이후 대륙 횡단 철도가 만들어지고, 전기통신망 확장 등 기회가 넘쳐나는 땅이었다. 이와 더불어 우후죽순 생겨나던 기업들의 담합(카르텔) 등이 판쳤다. 이를 막기 위해 반독점법이 제정됐지만, 역시 또 이를 피하기 위한 이합집산의 수단으로 M&A가 활용됐다. 실제로 1893년부터 1904년 사이 철강·석유·광산·철도 산업의 4,277개 회사가 257개로 재편됐다. (사례로 보는 M&A의 역사와 전략, 김화진) 1899년에만 무려 1,208건의 M&A가 이뤄진다. (메릴린치, 1989) 철강왕이니 석유왕이니, 철도왕이니 등의 ‘재벌’도 이 시기 탄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에스스틸이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탄생시킨 회사다.) 1901년 투자은행인 JP모건은 카네기스틸과 페더럴스틸, 네셔널스틸 등의 합병을 위해 4억9,200만달러(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51억달러, 우리 돈으로 무려 17조원!)의 자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당시 세계 최대 기업인 유에스스틸이다. (물론 정 반대 사례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03년 M&A를 통해 미국 시장을 90% 장악했던 아메리칸타바코와 스탠더드오일은 반독접법으로 기소돼 강제 분할되는 운명을 맞기도. )
이후 미국의 반독점법은 클레이튼법(Clayton Act), 셀러키포버법(Celler-Kefauver Act) 등으로 진화했고, 이에 맞춰 M&A의 방법과 수단도 여러 갈래로 분화해왔다. 이 과정에서 텍스토론 등 복합기업(conglomerate, 여러 산업에 걸쳐 계열회사를 둔 기업집단으로 한국의 대기업과 유사하다)과 엑손모빌 등이 기업도 이때 탄생한다. 경제의 성장과 경영의 실패, 환경변화, 그리고 규제가 맞물리는 상황 등을 뚫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수단은 M&A였다.
M&A 시장을 키운 동력이 독점과 반독점의 구도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일반 대중들의 뇌리 속에 ‘M&A=기업사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단단히 똬리를 틀게 된다.(물론 적대적 M&A가 가끔 벌어지긴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지난 100년 세계를 쥐고 흔들던 기업은 죄다 미국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지금의 FAANG(Facebook, Amazon, Apple, Neflex, Google)도 마찬가지. 미국이 단일규모 최대 시장을 가진 게 이유일까. 혹은 미국이 혁신이 꽃피울 수 있는 유일한 땅이라 그럴까. 유독 미국서 빈번했던 M&A는 이들에게 어떤 기회를 만들어줬을까.
IMF 위기發 매물 '헐값'에 사들여 대박친 외국자본... 지금은 다를까 |
쉬운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직장이 이유든, 결혼 때문이든, 혹은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든 집을 샀다고 생각해보자. 누구도 벌어들이는 현금으로만 살 수 없는 탓에 은행서 돈을 빌렸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서 집을 팔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역시 이유는 제각각이다. 직장을 옮겼든, 가정이 깨졌든, 혹은 자식이 장성해 독립을 했든. 또는 집값이 오르면서 생긴 자본이득을 현실화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헌데 살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은 훌쩍 멀어진 직장을 피곤하게 오가야 한다. 한 지붕을 이고 살 수 없을 만큼 틀어진 배우자와 ‘오월동주’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식들이 떠나가면서 휑해진 공간을 쓸데없는 것들로 채워 넣거나, 혹은 청소기를 돌리면서 투덜거릴 수도. 자본이득 실현은 언감생심. 가장 난처한 것은 벌이가 중단된 경우다. 은행 이자는 어떻게 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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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심하시라. 정상적으로 주택시장이 돌아가고 있다고 가정하면, 당신의 집을 사줄 이는 언제고 나타난다.(아 물론 특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2013년을 전후해 언론에 오르내린 ‘하우스푸어’를 기억하는가. 집을 산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실종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은행 빚을 갚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몰렸다.)
기업을 사고파는 ‘회수시장(Exit Market)’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집과 달리 기업은 매수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많은 기업이 위기를 겪지만, 개별적으로 자금경색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도 많다. 특히 ‘문어발식’ 집단으로 꾸려진 우리 대기업의 경우 특정 계열회사를 매각해 위기를 타개하지 못하면 그룹 전체가 공중 분해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 당시 무수한 대기업이 쓰러졌다.)
이런 구도는 위기 때엔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이런 일이 IMF 외환위기 직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당시 국내 금융기관을 비롯해 대기업 대부분이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많은 계열회사를 인수합병(M&A) 시장에 내놨다. 문제는 금융기관도, 대기업도, 정부 모두가 돈줄이 마른 위기다 보니 이를 사줄 곳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빈자리는 외국자본이 채웠다. 얼마나 많았을까. 2001년 한 유력 언론사는 이런 제목의 기사를 썼다. “외국자본 밀물… 주요 은행-증권사 3곳중 1곳 대주주”.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탈을 비롯해 많은 금융기관의 주인이 외국계였다. 뉴브리지캐피탈은 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PEF(경영참여형 사모펀드)인 텍사스퍼시픽그룹(TPG)의 전신이다. 2003년 외환은행을 사들인 론스타캐피탈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유명하다.(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사들일 당시 ‘단일’ 최대주주는 독일의 코메르츠방크였다. 수출입은행 등 정부의 합산지분율이 더 크긴 했지만.)
금융기관뿐만이 아니다. 200년대 초반 SK브로드밴드의 전신인 하나로텔레콤을 비롯해 극동건설, STX중공업, 하이닉스 비메모리사업부(현 매그나칩), 하이마트, 위니아만도 등등 수많은 국내 기업이 외국계 PEF 등에 팔려나갔다. 이유는 단 하나다. 국내 기업 중에선 살 곳이 없었기 때문. (이들을 다시 국내 기업이 사들여 올 때 매각 당시 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러야 했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회수시장 없인 혁신도 없다... 외국자본 자리 대신한 토종 PEF |
M&A는 기업의 혁신을 가속화 하기도 한다. 기업의 층위는 다양하다. 이제 막 창업한 스타트업부터 어느 정도 궤도에 안착한 중소기업, 이보다 더 큰 중견기업과 대기업까지. 특히 스타트업의 경우엔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팔리는 것은 더 중요하다. (기업을 사고파는 시장을 회수시장(Exit Market)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개별 기업뿐만 아니라 산업차원에서도 중요하다. 미국에서 ‘세계 1등’ 기업이 꾸준히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기술력 있는 스타트업이나 중소·중견기업을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대기업이 사들여 새 성장판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구글의 지주회사인 알파벳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구글은 2001년부터 샀다 되판 모토로라를 비롯해 확인된 것만 236개의 기업을 사들였다!)
PEF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경영권 인수(Buy-out) 투자를 통해 사실상 유일하게 국내 회수시장을 지탱하고 있는 게 PEF다. IMF 당시 외국 PEF가 하던 역할을 이젠 국내 PEF가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두산솔루스와 (주)두산 모트롤BG 사업부를 비롯해 두산인프라코어까지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두산그룹의 매물 대부분 사모펀드가 주요 인수 후보다.
자,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M&A란 무엇인가. 산업의 발전이란 무릇 기업의 죽음과 삶을 토대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어 나가는 기업을 그대로 두고, 또 새로운 기업이 태어나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 없는 노릇. M&A는 파는 기업도, 사는 기업도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생존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은 성장을 위한 ‘지름길’도 되지만, 또 기업가에게 혁신을 불지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M&A가 없다면 우리 기업과 산업, 나아가 국민경제는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아직도 당신은 M&A를 기업사냥이라고 생각하는가.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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