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끌려왔는데 또 5년...법다툼에 '초격차·반도체 2030' 가시밭길 |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지난 1일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으로 기소됨에 따라 삼성의 ‘잃어버린 10년’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재계에서 나온다.
기소에 따른 총수의 경영 공백으로 삼성의 대규모 투자가 늦춰질 경우 오는 2030년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른다는 삼성의 ‘반도체 비전 2030’ 달성에도 악영향을 줄 것으로 예측된다.
2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검찰의 기소로 재판이 시작되면 이 부회장은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길게는 5년가량 재판에 매달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특검의 수사가 시작된 지난 2016년 11월부터 햇수로 5년간 사법 리스크에 시달려왔다. 2017년 4월 시작된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재판은 3년5개월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여기에 이번 기소로 이 부회장이 최장 5년을 더 재판에 휘둘리게 돼 재계에서는 삼성의 사법 리스크가 10년은 갈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당장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의혹 재판이 시작되면 이 부회장은 재판 출석 및 준비에 시간을 쏟아야 해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불가능해진다. 앞서 이 부회장은 2017년 특검의 기소로 열린 국정농단 재판에 1심에서만 53차례를 포함해 총 70여차례 출석했다. 당시 오전에 열린 재판이 저녁 늦게 끝나거나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부회장이 법정에서 보낸 시간만도 총 470여 시간에 이른다.
이 재판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삼성 전·현직 임직원들도 재판에 줄줄이 불려 나가면서 정상적인 경영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여기에 이번 기소로 이 부회장이 매주 2~3회가량 법정에 서게 되면 경영에 집중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재판 출석 전 재판 전략을 논의하고 재판 당일에는 하루 종일 법정에 있어야 하는데 경영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고 말했다.
133조 투입 '비전 2030' 적신호 켜졌다 |
이 부회장의 경영 공백은 삼성의 대규모 투자 지연과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수조~수십조원 단위의 대규모 투자에는 총수인 이 부회장의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총 133조원을 투입하는 ‘반도체 비전 2030’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치열한 글로벌 반도체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선제적인 대형 투자가 필수적인데 재판 일정으로 반도체 사업 구상이 뒤로 밀릴 수 있어서다. 삼성의 반도체 비전 달성을 위한 핵심 분야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는 선두 업체인 대만 TSMC가 2나노 공정에 22조원을 전격 투자하며 삼성에 한발 앞서나가고 있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총수인 이 부회장이 연일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이 부회장에게 대규모 투자나 신사업 추진 등을 보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삼성 반도체 신화를 이끈 권오현 삼성전자 고문도 최근 “전문경영인은 적자를 보거나 불황인 상황에서 몇 조원을 투자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며 “리스크가 큰 반도체 사업은 최고경영층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병태 KAIST 경영학 교수는 “검찰의 기소로 삼성은 브랜드 이미지 손상을 피할 수 없게 됐다”며 “특히 이번 기소가 회계부정과 관련된 사안인 만큼 부정을 저지른 기업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해외 기관투자가들이 삼성에 투자하지 않게 되면 삼성뿐 아니라 국가 경제에도 크나큰 손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도 흔들 |
검찰의 기소로 이 부회장의 해외 출장에도 제약이 불가피해 삼성의 강점인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도 흔들릴 것으로 분석된다. 이 부회장은 그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 거물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사업 파트너십을 다져왔다. 2016년에는 미국 선밸리 콘퍼런스에서 지니 로메티 당시 IBM CEO와 만나 양사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결과 지난달 IBM의 차세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위탁생산 물량을 따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기소로 이 부회장의 해외 출장이 어려워지며 글로벌 IT 리더들과 만나 업계 트렌드를 논하고 미래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이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번 기소로 이 부회장과 삼성의 글로벌 이미지에 타격이 예상되는 점도 향후 글로벌 투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검찰의 기소가 가뜩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위기를 맞은 국가 경제에도 악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재용·변수연기자 jylee@sedaily.com
113조 쥐었지만 공격적 M&A 시도 어려운 삼성 |
‘113조4,000억원’
올 2·4분기 삼성전자가 보유한 현금이다. 전년 동기의 99조3,100억원과 비교해 무려 15%가량 늘었다.
이 같은 현금 규모라면 글로벌 1위 전장용 반도체 업체인 네덜란드의 NXP(시가총액 351억달러)는 물론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의 팹리스’로 불리는 영국의 ARM 인수까지 가능하다. 지난 2016년 소프트뱅크가 ARM을 인수했을 당시 지불한 금액이 320억달러 수준이었는데 현재 ARM의 몸값은 400억~500억달러로 추정된다. 이들 업체를 인수할 경우 ‘엑시노스 오토’와 같은 차량용 ‘시스템온칩(SoC)’을 보유한 삼성전자로서는 자율주행차 등 미래차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 1위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은 물론 중앙처리장치(CPU) 등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도 인텔이나 AMD를 위협할 만한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인수합병(M&A)은 2016년 약 9조원에 전장 1위 사업자인 하만 인수 이후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 때문이다.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각종 불확실성 속에서도 몇십년의 미래 성과를 내다보고 기업 인수에 수 조원을 쏟아 붓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삼성이 ‘오너 경영’ 특유의 발 빠른 경영 판단으로 메모리반도체·스마트폰·TV 부문에서 글로벌 1위에 올라섰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법 리스크가 M&A를 기반으로 한 삼성의 미래 전략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상당하다.
반면 삼성전자의 경쟁 업체들은 M&A로 미래 시장을 빠르게 선점하고 있다. 삼성과 반도체 업계 매출 1위 자리를 놓고 수년째 경쟁하고 있는 인텔은 2015년 6월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업체 ‘알테라’를 160억달러에, 2017년 3월에는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개발 업체인 ‘모빌아이’를 153억달러에 각각 인수했다. 또 올해 5월에는 서비스형모빌리티(Maas) 업체 ‘무빗’을 9억달러에 인수하며 향후 급성장이 예상되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확보했다.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활용한 인공지능(AI) 기술인 ‘GPGPU’ 등장으로 AI 시장의 절대 강자로 떠오른 엔비디아의 행보도 삼성전자에 위협이 된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3월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업체인 ‘멜라녹스테크놀로지스’를 70억달러에 인수하며 노트북에 이어 서버용 반도체 시장 경쟁력을 강화했다. 최근에는 ARM 인수에 나서며 CPU와 GPU를 아우르는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신경망처리장치(NPU) 개발 등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향상을 위해 AI에 집중 투자하고 있지만 M&A 없이는 엔비디아의 AI 기술 추격이 버거울 것으로 전망된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선두권 업체인 독일 인피니언은 지난해 6월 전력반도체 업체인 ‘사이프러스반도체’를 90억유로에 인수했다. 독일은 보쉬 등 자동차부품 업체 외에 폭스바겐·BMW 등 완성차 업체를 보유한 국가라는 점에서 인피니언의 경쟁력 강화는 독일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 공략을 꾀하고 있는 삼성전자에 좋지 않은 소식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삼성전자의 배당액은 시민단체의 압박 등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2014년 3조원 규모이던 삼성전자 배당액은 올해 9조6,000억원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주주 비율은 55.8%에 달한다. 삼성전자가 M&A에 활용하지 못한 자금 중 매년 5조원 이상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셈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검찰 칼날 삼성 찌르자...허탈한 재계 |
1년 8개월간 이어진 수사 끝에 지난 1일 검찰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재판에 넘기자 재계는 침통한 분위기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여겨졌던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나 전문가 의견수렴 같은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는 결국 기소를 향한 검찰의 행보를 막을 수 없었기에 ‘허탈하다’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10대 그룹 관계자는 이 부회장 기소 소식에 대해 “검찰이 내린 결론을 맞추기 위해 수사를 밀어붙이다 결국 하나만 취하고 열은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10대 그룹 관계자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기업이든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검찰 권력이 두렵다”며 “이 부회장 기소에 대해 코멘트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고 극도로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검찰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운 국가 경제를 고려해 기소 여부를 판단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이날 접촉한 주요 기업과 재계 단체들은 서울경제에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거절하면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이 부회장이 기소돼 삼성그룹은 물론 국가 경제 전반에 나쁜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차세대 먹거리를 찾기 위해 총수와 경영진의 노력과 판단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임에 틀림이 없다”며 “수사심의위의 불기소 권고를 깡그리 무시하면서까지 기소를 한 것에 대해 우려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는 지난 6월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 문제 등으로 수사를 받아온 이 부회장 등에 대한 불기소와 수사 중단을 검찰에 권고했다. 당시 판단에 참여한 13명의 위원 가운데 10명이 불기소 권고에 힘을 보탰다.
한편 5월 이 부회장이 무노조 경영 방침과 자녀에게 기업 승계 포기 등을 선언하는 데 영향을 끼친 삼성준법감시위원회는 기소 여부와 상관없이 설립 당시 약속한 역할을 수행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삼성준법위 관계자는 “대내외적 여건과 관계없이 맡은 임무를 성실히 이어나갈 것”이라며 다음 달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정기회의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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