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기업인 입국절차간소화제도(패스트트랙)가 뚜렷한 이유 없이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가 선택적으로 전세기 비행허가를 내주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재계는 극도의 경영 불확실성과 마주하게 됐다.
12일 재계에 따르면 중국 정부로부터 전세기 비행허가를 받지 못한 삼성전자(005930)는 물론 중국 내 제조 기반을 보유하고 있는 현대자동차·SK(034730)·LG(003550) 등 주요 그룹은 중국 정부의 방역정책 변화가 경영에 미칠 영향을 파악하고 나섰다.
다수의 기업은 연말 인사로 교체되는 인력의 이동을 우려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 우시에 자회사 SK하이닉스(000660)시스템IC의 파운드리 공장 가동을 앞두고 있는 SK하이닉스나 지난 7월 양산에 돌입한 중국 광저우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공장으로 매달 두세 차례 전세기를 띄우는 LG디스플레이(034220) 등은 더욱 이번 이슈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모습이다.
다만 현대차(005380)는 9월 전세기를 세 차례에 걸쳐 띄우며 대규모 인원이 이동했기에 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포스코나 두산인프라코어도 “현지인을 중심으로 생산과 영업활동을 진행하고 있어 영향이 적을 것”이라고 답했다.
한중 기업인이 이용했던 신속통로인 패스트트랙은 5월 1일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래 1만여 명이 이용했을 정도로 코로나19 시대에도 흔들림 없는 ‘수출 한국’의 기반이 돼줬다. 사전에 현지기업의 초청장을 받은 기업인은 전세기를 통해 입국하며 코로나19 진단검사에서 음성판정을 받을 경우 지역에 따라 최소 14일, 최대 28일에 달하는 자가격리 없이 수일 내에 현지근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중국 내 제조 기반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 중에서도 투자 규모가 크고 인지도가 높은 4대 기업은 현지법인이 초청장을 발송하고 본사에서 전세기를 수배해 필요인력을 급파하는 형식으로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해왔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코로나19 여파에도 삼성전자나 LG전자(066570)·현대차 등 주요 기업들이 기대 이상의 실적을 낸 데는 중국 내 제조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하는 패스트트랙의 공이 컸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갑작스러운 이번 결정은 양국 정부와 재계의 상호 신뢰 아래 약속한 혜택도 언제든 취소될 수 있다는 선례로 남게 됐다. 아울러 외교가에서는 중국 정부가 “선택적 전세기 허가를 내주고 있다”는 말까지 돌면서 재계는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처지다. 실제로 이날 오전 LG디스플레이가 띄운 전세기 1대는 문제없이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다. 외교부는 이를 근거로 “한중 패스트트랙이 공식적으로 중단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역설적으로 중국 정부의 ‘선택 기준’을 파악하기 위해 진땀을 빼게 됐다. LG디스플레이는 사전에 전세기 비행허가를 받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정부의 별다른 설명도 없는 일방적 통보에 한국 기업의 전세기가 취소되는 것이 당황스럽다”며 “전세기 허가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니 언제 우리 회사도 삼성전자처럼 날벼락을 맞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한편 불확실성이 가중된 한중 패스트트랙을 두고 재계에서는 중견·중소기업에 ‘그림의 떡’이었던 제도가 아예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제도에 따르면 한국 기업인을 초청하는 중국 기업은 입국자가 코로나19 지역감염의 원인으로 지목됐을 경우 민형사상의 책임을 비롯해 방역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기로 돼 있다. 따라서 현지법인을 운영하는 대기업은 위험을 감수하고 대규모 인력을 파견해왔지만 자본과 인프라가 부족한 중견·중소기업은 제도 활용을 시도하기 어려웠다. 수출기업의 한 관계자는 “중국 고객사로부터 힘들게 초청장을 받아도 중국 정부의 비자 승인을 받기도 어려웠다”며 “중국에 막대한 투자를 한 삼성 같은 대기업도 전세기가 취소된다고 하니 중견기업으로서는 어렵게 뚫은 수출길이 막힐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은 경제교류가 활발한 중국을 포함해 일본·베트남과 기업인을 위한 패스트트랙을 운영하고 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이수민·박시진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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