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북 정책을 최종 조율할 예정인 가운데 북한에 대한 제재를 섣불리 해제하면 기존에 보유한 핵무기를 인정하는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핵 동결의 대가로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가 일부 풀리면 이후 시간 끌기로 버틸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이 경우 기존에 알려진 영변 이외의 핵 시설을 찾아내 폐기하기가 어려워지고 미래에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야 할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북미 간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핵 시설을 폐쇄하는 대가로 우리에게 군축을 요구할 경우 되레 국내 안보에 빨간 불이 켜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한미정상회담의 핵심 의제인 대북 정책과 관련해 문 대통령이 제안하는 ‘종전 선언’과 ‘북미 싱가포르 선언 계승’ 등 여러 외교적 접근법 가운데 일부가 담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통해 북미 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면 북한의 핵 동결 조치와 경제 제재의 일부 해제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경색된 북미 관계를 해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이 경우 한반도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 단계인 북한 핵 동결로 끝날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랜드연구소와 브루킹스연구소 등은 현재 북한을 ‘핵무기 취득 국가(de-facto nuclear state)’로 간주하는 만큼 기존 핵 폐기 조치까지 이어져야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북미가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면 핵 동결과 제재 해제 카드를 맞교환할 수 있는데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 11개 가운데 1개만 해제해도 나머지가 흐지부지될 수 있다”며 “북한은 제재가 풀리면 경제적 활로를 찾게 되고 이후 시간만 끌면서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려 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단계적 접근은 한계 명확… 北, 단물 빼먹다 핵동결로 끝낼 수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북한이 서로 양보와 보상을 주고받으며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같은 대북 접근 방식은 한미정상회담에서도 상당 부분 반영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게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새 대북 정책을 단계적 방식의 ‘실용 외교’라고 정의했는데 1단계 화해 분위기 조성→2단계 핵 동결 및 제재 완화→3단계 비핵화 및 체제 보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경우 2단계에서 3단계로 진전시킬 협상 카드가 핵심으로 그동안 북한의 정치적 행보를 살펴보면 2단계에서 시간만 계속 끌 위험성이 있다는 평가다. 북한은 경제제재가 풀리면 영변 이외의 핵 시설에 대해 어떠한 조사도 불허하고 버티기로 나설 것이며 결국 북핵 문제는 최종 종착지인 핵 폐기가 아닌 핵 동결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북핵, 단계적 해법 어떻게 이뤄질까=전문가들은 북한이 경제난으로 한미정상회담 이후 미국과의 대화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실무진 차원에서 만나 인도적 지원 문제를 거론한 뒤 북핵 협상을 두고 고위급 회담까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북한은 현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와 홍수 등 자연재해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이다. 김덕훈 북한 내각 총리가 최근 양강도·함경남도 등 경제 현장을 분주하게 방문하며 경제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미국은 북한과 여러 차례 대화가 이뤄지면 본격적으로 비핵화 협의를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북한 영변 핵 시설 등의 폐쇄와 유엔 안보리 제재 해제 조치가 서로 맞교환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북한은 현재 11개의 제재 가운데 광물 수출입 금지, 금융기관 활동 금지, 수산물 수출 금지, 정유 배럴 상한선 해제, 해외 근로자 귀환 조치 등 다섯 가지에 대한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대북 접근 방식을 정상 간 합의를 통한 ‘일괄타결’을 선호했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는 실무진 차원에서 단계적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라며 “대화가 몇 차례 이뤄지면 비핵화 협상의 물꼬가 트이면서 북한 내 플루토늄, 고농축 우라늄 시설 폐쇄와 경제제재 해제가 맞교환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핵 폐기는 ‘희망고문’…영변 이외 시설은 비공개할 듯=북미 간 협상은 이후 3단계인 핵 폐기와 체제 보장 논의로 이어지는데 북한은 이 과정에서 각종 트집을 잡으며 협상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북한으로서는 2단계에서 이미 얻어야 할 상당 부분을 얻어냈기에 3단계를 굳이 이행할 동기부여가 안 된다는 지적이다. 문 대통령은 앞서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2018년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 ‘핵 없이도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면 왜 굳이 제재를 받아가면서 힘들게 핵을 이고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전했지만 북한의 속셈은 다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박 교수는 “영변 핵 시설 폐쇄 등은 핵 동결 조치로서 중간 단계로, 북한이 원하는 광물 수출, 정유 수입 허용을 해주면 북한 경제가 급속도로 회복할 것”이라며 “이 경우 북한은 핵 폐기 등 다음 단계로 이행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시간만 계속 끌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북한은 또 이미 알려진 영변 핵 시설 이외의 시설은 철저하게 부인하며 비밀리에 핵 개발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도 나온다. 아산정책연구원과 미국 랜드연구소는 최근 북한 핵 시설과 관련해 최소 5곳에서 최대 116개의 핵무기를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 장호진 한국해양대 석좌교수는 “북한은 핵 동결 협상 이후에도 영변 이외의 시설에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며 “핵 동결 협상에 그쳐서는 절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北, 핵시설 폐기 대가로 ‘韓 군축’ 요구 가능성… 되레 안보 빨간 불>
국방 전문가들은 북미 간의 비핵화 협상의 본말이 전도돼 북한이 의도하는 ‘핵군축 협상’으로 변질되면 안보 공약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국가비상기획위원와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한 박헌옥 북한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20여 년간 핵 문제에 대한 북한의 태도를 분석해 보면 핵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보유하겠다는 속내가 분명하다”며 “이를 통해 핵을 갖지 않은 한반도 안보 상황과 관련해 한국을 종속시키고, 미국과는 핵군축 협상을 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범위부터 논란인 비핵화 협상
북핵 문제를 둘러싼 협상이 사실상 핵군축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논란의 단초는 모호한 비핵화의 범위에서 비롯된다. 당초 조 바이든 정부의 주요 관계자들은 ‘북한 비핵화’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지난 4월 말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우리의 목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고 밝혔다.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로 범위가 모호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배치된 핵무기가 없다. 무기급으로 전용될 핵물질도 없다. 1차 북핵 위기가 터진 후 1992년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이르는 사태 수습 차원에서 미군은 이미 한국에 배치했던 전술핵을 철수시켰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비핵화의 대상은 한반도가 아니라 북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고집하는 것은 유사시 한국을 보호해줄 미국의 핵전력이 한반도에 전개되거나 주변 지역에서 운용되지 못하도록 걸림돌을 만들려는 차원으로 해석된다.
군의 한 관계자는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를 해주면 북한은 이를 빌미로 미국이 전술핵무기뿐만 아니라 핵추진 체계로 움직이는 군용 플랫폼까지도 한반도 일대에서 모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유사시에 대비해 (핵추진) 항모를 동원하는 미군 증원연습이나 핵추진잠수함 등의 한국 내 기항도 차질을 빚게 돼 결과적으로 대북 안보 태세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핵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우리의 재래식 전략 확충에도 먹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했던 원자력 추진 잠수함 도입은 물론이고 해군이 경항모 도입 후 차기 혹은 차차기 사업으로 확보하려고 꿈꾸는 핵추진항모도 물 건너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vs 북중동맹의 함수
북한이 향후 한미의 비핵화 협상 제의에 응하게 된다면 북미 간 수교 등 정식 외교 관계 수립, 평화 협정 체결을 다시 한번 요구할 것이 자명해보인다. 특히 북미 수교 관계가 수립되면 북한 측은 자국을 적대시할 소지가 있는 정책과 수단 등을 완전히 폐기할 것을 미국에 지속적으로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결국 주한미군의 감축·철수나 역할 변화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의 시각에서 볼 때 주한미군은 미국 대북 정책의 상징이자 핵심 수단이기 때문이다. 주요 국방 전문가들도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향방에 따라 주한미군을 비롯한 한미 동맹 관계에 조정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도 적지 않다. 현 정부에서 청와대 참모를 지냈던 여권의 주요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김정은 정권은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져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으로서는 미국 못지않게 중국에 한반도가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데 주한미군이 이를 뒷받침할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더라”고 전했다. 반면 군의 한 관계자는 “북중간 신냉전 구도로 국제 정세가 급변한 상황에서 중국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입지를 한층 더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종전 선언 및 평화 협정 체결을 도모하려는 북한 입장에서는 종전 선언의 당사자가 될 중국의 심기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부정적 의견을 냈다.
◇검증을 누가 하나
우여곡절 끝에 비핵화 협상이 타결됐다고 해도 안심하기는 이르다고 원자력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차 북핵 위기 당시 정부에 자문 역할을 했던 한 원자력 전문가는 “북한이 비핵화를 하기로 약속했다고 해도 제대로 핵물질·핵무기·핵설비를 신고했는지 검증하는 주체를 누구로 할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미는 객관성과 전문성을 가진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비핵화 검증 주체로 희망하겠지만 북한이 IAEA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만큼 제 3자를 내세우거나 남북 간 상호 사찰, 검증 방식 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검증 주체 문제가 해소된다고 해도 북한이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소규모 지하 핵시설 등을 은폐한 채 핵무기·핵물질 등을 은닉하면 이를 완전히 찾아내 폐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향후 한미가 북한을 핵협상 테이블에 끌어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성급한 합의 도출에 얽매이기보다는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핵 폐기에 이를 수 있는 신뢰성 있는 프로세스의 원칙을 북한과 함께 만들어가야 ‘무늬만 비핵화, 결국은 핵군축’이라는 함정에 빠져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강동효 기자 kdhyo@sedaily.com, 허세민 기자 semin@sedaily.com, 김혜린 기자 rin@sedaily.com, 민병권 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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