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유럽에 반도체 공장 두 곳을 건설하는 등 10년 동안 총 950억 달러(약 110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미세 공정 개발이 부진한 가운데 지난 3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제조)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이 본격적으로 팹(생산 라인) 확장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분석이다. 앞으로 TSMC·삼성전자·인텔 등 반도체 분야의 세계 최고 기업 간 ‘쩐의 전쟁’도 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7일(현지 시간) 독일 뮌헨에서 개최된 ‘IAA 모빌리티 2021’에서 이 같은 계획을 공개했다. 겔싱어 CEO는 “세계적으로 반도체 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과감한 전략이 필요하다”며 “이번 투자는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산업의 촉매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20년대 말까지 차량용 반도체 시장이 두 배로 성장할 것”이라고 투자 배경을 설명했다. 인텔은 앞서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 총 235억 달러를 들여 생산 라인을 짓겠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에는 겔싱어 CEO가 유럽을 돌며 11조 원의 보조금을 유치하기 위해 뛰기도 했다.
TSMC·삼성 등과의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TSMC는 4월 애리조나 공장 건설 등에 3년간 1,000억 달러(약 116조 원)를 투입하기로 했고 삼성은 지난달 총 240조 원(반도체는 150조 원 추정)을 투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세 업체 모두 반도체 시장 급성장의 과실을 누리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셈이다. 특히 최근에는 TSMC 등 주요 파운드리가 일제히 칩 제작 가격을 올리며 투자에 따른 비용 부담을 팹리스(반도체 설계 업체)에 전가하고 있다.
◇반도체 ‘錢(전)의 전쟁’… 세계 곳곳에서 파운드리 증설 움직임
인텔이 10년간 110조 원(800억 유로)을 들여 두 개의 반도체 공장을 유럽에 짓겠다는 발표는 삼성전자·TSMC 등 초대형 반도체 기업들의 반도체 패권 전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삼성전자도 지난 5월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 기존 133조 원에 38조 원을 더해 총 171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으며 대만 TSMC도 미국 애리조나주에 4년간 110조 원 이상을 쏟아붓기로 했다. 이들 3사의 시스템 반도체 투자 규모는 모두 400조 원에 달한다.
1월 선임된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3월 ‘IDM 2.0’이라는 정책에서 파운드리 사업을 발표한 후 기존 파운드리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투자를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애리조나주에 약 22조 원을 투자해 신규 반도체 공장 2개를 설립하고 뉴멕시코주에는 약 4조 원을 투입해 반도체 패키징 센터를 확충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이번에는 유럽에 110조 원을 쏟아붓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110조 원은 인텔의 지난해 설비 투자액(14조 원)의 8배에 해당하는 초대형 투자다.
인텔이 새롭게 구축하게 될 유럽 반도체 팹 2기와 기존 아일랜드 팹의 운영 방안은 결정되지 않았다. 100% 고객사의 칩을 생산하는 파운드리로 가동될지 인텔의 주력 칩 생산 라인과 파운드리 라인을 이원화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러나 겔싱어 CEO는 이 전략을 발표한 ‘IAA 2021’ 기조연설에서 차량용 반도체 강자들이 모인 유럽 팹리스(칩 설계 회사)들을 만족시킬 만한 파운드리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현재 대부분의 자동차 반도체는 기존 공정 기술을 활용하고 있지만 자동차 애플리케이션이 고성능 프로세서에 의존하게 되면서 차량용 칩도 고급 공정 기술로 제작되기 시작했다”며 “자동차 반도체 설계자들에게 고급 공정을 지원하기 위해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액셀러레이터를 출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는 2023년부터 도입하기로 한 7㎚(나노미터·10억 분의 1m) 이하 극자외선(EUV) 양산 라인이 들어설 가능성도 커 보인다.
인텔의 이번 발표에는 삼성전자·TSMC 등 기존 파운드리 강자보다 먼저 유럽 시장을 차지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올해 인텔은 파운드리 사업을 재개하면서 줄곧 ‘불균형한 반도체 제조 시장’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반도체 생산의 80%가 삼성전자·TSMC 등이 있는 아시아에서 이뤄지고 있어 파운드리 서비스 공급에 병목현상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형 투자를 통해 현지 고객사들을 측면 지원하면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인텔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파운드리 사업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삼성전자와 TSMC도 더욱 치열하게 ‘쩐의 전쟁’에 참전해 세계 각지에 있는 고객사와 폭발하는 수요에 대응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우선 미국에 오스틴 공장(S2)에 이은 미국 제2파운드리 건설을 위한 부지 선정에 더욱 속도를 올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이미 5월 170억 달러(약 20조 원)를 미국 신규 파운드리 구축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텍사스주·애리조나주·뉴욕주의 5개 도시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조만간 부지가 결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현지 파운드리는 물론 국내 평택 2공장(P2) 파운드리, 3공장(P3) 파운드리 양산 라인 투자 규모가 어느 정도로 늘어날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내년 하반기 가동 예정인 P3에서는 다중가교채널트랜지스터(MBCFET) 기술 기반 3나노 제품 양산 라인이 갖춰질 것으로 관측된다. 대당 1,500억 원을 호가하는 ASML의 EUV 노광기와 공급 부족 현상으로 가격이 상승 중인 대당 수십억 원대의 반도체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과감한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대만에 생산 거점을 둔 TSMC는 이미 미국 애리조나주에 4년간 110조 원 이상을 쏟아부으며 5나노 이하 반도체 팹 6기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또 일본에는 200억 엔(약 2,100억 원)을 투입해 반도체 패키징을 연구하는 센터를 짓는 등 생산·연구개발 라인을 세계 각지에 두기 위해 대형 투자를 진행하는 모습이다.
또 인텔이 유럽 시장에 신규 팹 구축 계획을 먼저 발표하면서 TSMC도 그간 검토 중이던 유럽 지역 팹 설립을 서두를 공산이 커졌다. 업계에서는 독일 드레스덴이 TSMC의 유럽 거점 유력 후보지로 떠오른 가운데 향후 TSMC의 유럽 진출에 더욱 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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