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 반도체·디스플레이·전기차 배터리 등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에서 중국을 비롯한 후발 국가들의 추격이 거세지고 있다. 더 이상 ‘반도체 강국’ ‘배터리 선두 국가’ 등 영광에 취해있어선 안 된다는 경고음마저 잇따라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한편 이 같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성장성이 높은 ‘틈새시장’을 노리고 일찌감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온 기업들도 있다. 어려운 경영 환경에도 각 사의 역량을 집약한 글로벌 1위 품목을 육성해 ‘캐시카우’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고부가합성수지(ABS)에서 전 세계 1위를 달리는 LG화학이 대표적이다. 9일 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연간 200만 톤에 달하는 ABS를 생산하며 글로벌 시장점유율의 20%를 기록하고 있다. ABS는 뛰어난 가공성을 바탕으로 자동차 내장재를 비롯해 TV나 공기청정기와 같은 가전제품에 사용된다.
LG화학이 ABS 시장에서 글로벌 1위를 수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친환경’ 수요를 간파하고 선제적인 투자를 단행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 ABS는 재활용하면 강도가 약해지고 검은색과 회색으로만 만들 수 있었다. LG화학은 지난해 7월 세계 최초로 친환경 PCR(소비자 사용 후 재활용한) 화이트 ABS 상업 생산에 성공하며 재활용 ABS 물성을 기존 제품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경쟁사보다 친환경 기술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격차를 벌린 결과 ABS는 LG화학 석유화학사업본부 매출의 30%를 차지하는 핵심 사업으로 성장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을 주축으로 한 세계적인 탄소 중립 기조에 따라 기업들은 친환경적 요소를 부각할 수 있는 사업을 확대하는 추세다. 지난 8일 발족한 수소기업협의체 ‘코리아 H₂ 비즈니스 서밋’에 회원사로 참여한 코오롱은 수소전기차 시장 확대에 발맞춰 수소연료전지의 핵심 부품인 수분 제어 장치를 개발해왔다. 이 분야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코오롱인더스트리는 현대자동차그룹과 계약을 체결해 오는 2023년 출시되는 신형 넥쏘를 비롯한 다양한 수소 모빌리티에 공급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 엔진기계사업부는 전 세계 시장에 35%의 대형 엔진을 공급하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또 힘센엔진 및 국제 환경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친환경 박용제품을 자체 개발 공급해 해양 산업 발전에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힘센엔진은 개발 당시부터 뛰어난 품질과 디자인으로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인 호평을 받았다. 2001년 4대에 그쳤던 힘센엔진 생산량은 2004년 123대로 급등한 후 2007년 이후부터는 연간 800대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올 3월에는 생산 누계 1만 대 기록을 달성했다.
석유화학 기업은 주력 핵심 소재를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확보했다. 운동복 주재료인 스판덱스의 글로벌 시장점유율 32%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효성티앤씨는 최근 세계적인 스판덱스 품귀 현상의 혜택을 톡톡히 봤다. 운동복 수요 급증 속 중국의 수급 불안으로 스판덱스 재고가 전례 없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효성티앤씨의 전체 매출에서 스판덱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30%지만 영업이익에서는 90%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다. 키움증권은 보고서를 통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스포츠, 패션의류, 방역 위생 재료 분야의 스판덱스 수요가 확대됐다”며 “스판덱스 판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며 3분기 영업이익도 전 분기 대비 6.7% 증가한 4,132억 원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호석유화학의 NB라텍스 생산능력은 연간 64만 톤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금호석유화학은 현재 진행하고 있는 NB라텍스 7만 톤 증설이 완료되는 대로 24만 톤 증설에 돌입한다. 내구성과 인장강도를 향상시키면서 경량화를 위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이미 확실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 분야지만 더 큰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초격차’를 벌리겠다는 전략이다.
경쟁사와 압도적인 차이로 글로벌 1위를 수성 중인 기업도 있다. 효성첨단소재는 자동차 타이어의 뼈대 역할을 하는 폴리에스터(PET) 타이어코드 시장에서 점유율 50%를 차지하는 1위 업체다. 최근 자동차 시장이 되살아나며 타이어코드의 수요도 덩달아 뛰자 가격이 연일 상승세를 보이며 효성첨단소재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