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인간이 이용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을까? 자율주행 자동차나 학습능력을 확보한 AI를 뛰어넘은 진짜 생명체 같은 기계로 말이다. 한국계 미국인 현대미술가 아니카 이(Anicka Yi·50)는 이런 발상으로부터 ‘기계의 자연사(自然史)’를 묻기 시작했다. 결코 자연일 수 없는 기계를 자연사로 바라본 역설적 접근방식을 통해 작가는 “기계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 개체로 진화할 가능성을 탐구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물이 12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의 터바인 홀에서 개막한 아니카 이의 개인전 ‘인 러브 위드 어 월드(In Love With rhe World)’를 통해 공개돼 내년 1월16일까지 선보인다. 아니카 이는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과학적 연구에 주목해 온 작가로서 인공지능의 발달, 기후변화, 이주 등에 대한 현대 사회의 다양한 주제를 실험적 작품을 통해 선보여 왔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식물·동물·미생물·기계 사이의 개념적 차이를 없애고 융합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를 다르게 이해해 보기를 제안한다. 그는 튀김옷, 차(茶)를 활용해 만든 가죽 등 독특한 재료를 활용한 실험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시각예술가이나 청각·후각·촉각 등 오감을 자극하는 작품에도 탁월하다.
아니카 이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스위스 바젤의 쿤스트할레 바젤, 독일 카셀의 프리데리치아눔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미국 MIT 예술 과학 기술 센터의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지난 2016년 권위있는 휴고보스 미술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고 그 해 광주비엔날레, 2017년 휘트니비엔날레,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했다. 지난 8일 재개관한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전시에서도 그의 설치작업을 만날 수 있다.
관람객은 작품 감상을 위해 천장을 올려다 봐야 한다. 해파리처럼 생긴 물체들이 바닷속을 헤엄치듯 부드럽게 공중을 떠다닌다. 작가는 이들을 ‘에어로브(Aerobe)’라고 명명했다. 에어로브는 산소를 필요로 하는 ‘호기성생물’을 뜻한다. 에어로브 중 반투명한 몸체에 색이 다른 윗부분과 촉수를 가진 것은 ‘제노젤리(Xenojelly)’, 노란색 짧은 털로 뒤덮여 고치 형태를 한 것은 ‘플라눌라(Planula)’다. 해양 생물과 버섯의 형태를 본 뜬 것으로, 눈에 잘 띄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생태계 내 유기체들의 역할을 상징한다. 작은 날개와 배터리를 장착한 기계들은 헬륨을 이용해 공중을 떠다니고, 사람의 생체반응을 감지해 관람객 쪽으로 몰려들었다 흩어지기도 한다.
공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향기’를 이용하는 아니카 이는 테이트 모던이 위치한 런던 뱅크사이드(Bankside) 지역의 역사를 향으로 표현해 함께 선보였다. 한때 기계들로 꽉 찼던 곳에 신종 기계 생명체와 역사성을 가진 향기가 어우러지면서 테이트모던은 한순간 새로운 기계 생명체의 서식지로 탈바꿈한다.
이 전시는 현대자동차가 지난 2014년 테이트미술관과 장기 파트너십을 체결한 후 매년 터바인 홀에서의 대규모 개인전을 지원하는 ‘현대 커미션’의 일환이다. 2015년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를 시작으로 필립 파레노, 수퍼플렉스(SUPERFLEX), 타니아 브루게라, 카라 워커에 이어 아니카 이가 여섯 번째 현대커미션 작가로 참여했다. 화력발전소였던 낡은 공장이 세계적 건축가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의 설계를 거쳐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테이트 모던에서도 터바인 홀은 층고가 가장 높고, 방문객들의 이목이 가장 많이 쏠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