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 정부 시절인 1999년 처음 설립된 국민경제자문회의는 대통령 곁에서 경제정책 방향을 보좌하는 헌법상 최고 자문기구다. 대통령이 직접 의장을 맡고 실질 총괄은 부의장이 맡도록 돼 있다. 여기에 더해 기획재정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정책실장 등이 포함된 5인 이내의 당연직 의원과 30인 이내 민간위원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국민경제자문회의는 헌법적 위상과는 달리 실제 정책 현장에서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정권 초기만 해도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보수 성향의 김광두 서강대 석좌교수를 부의장으로 임명하며 “쓴소리를 내달라”고 당부하는 등 무시하기 어려운 위상을 자랑했지만 김 교수가 소득 주도 성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낸 뒤 지난 2018년 말 자진 사임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했다.
한동안 수면 아래 있던 자문회의가 기업 배당과 같은 예민한 문제에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일종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겠다는 전략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자문회의가 그동안 청와대로부터 ‘롤(role)’을 부여받지 못하고 겉돌았지만 대선 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민간위원을 중심으로 ‘앞으로는 다양한 정책 조언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문회의는 보고서와 관련해 “공식 견해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지만 앞으로 보고서에 담긴 의제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차기 정부의 경제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실제 자문회의가 8월 용역 발주해 제출받은 ‘과잉금융화 경향 진단 및 향후 정책적 대응방안’ 보고서에는 기업의 투자 확대를 유도하기 위한 급진적 대책이 다수 포함돼 있다. 문 대통령이 6월 4대 그룹 총수들을 불러 모아 ‘대담한 투자’를 요구한 지 두 달 만에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정책 제언이 도출된 셈이다. 정부가 기업 지배구조를 넘어 내부 현금 흐름까지 개입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사주 소각 금지와 배당소득세 인상 정책이다. 자사주 소각은 기업이 보유 현금(자기자본)을 활용해 기존 주주들로부터 주식을 매입한 뒤 이를 없애(소각) 주당 순익을 끌어올리는 주주 친화 정책 중 하나다. 분석 결과 삼성전자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155조 2,470억 원을 순이익으로 벌어들여 이 중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약 56조 3,000억 원을 썼다. 순이익의 36.3%를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쓴 것이다. 같은 기간 SK이노베이션은 당기순손실을 낸 해에도 주주 배당을 실시하면서 배당과 자사주 매입 비중이 순이익을 초과해 145.2%까지 치솟기도 했다.
보고서는 “우리 기업의 수익성이 향상되고 금융화가 진전되면서 주주에게 돌아가는 몫은 늘었지만 인건비 지출에는 큰 변화가 없어 기업 내 소득분배가 악화됐다”며 “자사주 소각을 금지하면 기업 내부 자금을 투자와 연구개발(R&D) 및 고용 창출 등에 사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 현금이 주주 이익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차단하고 대신 이 자금을 인건비 인상이나 외부 투자로 연결해 경제적 효과를 최대화하자는 주장이다. 현재 15.4%(소득 2,000만 원 이하 기준)인 배당소득세율도 더 인상해 기업 배당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게 보고서의 주장이다.
보고서는 여기에 더해 노동자와 지역사회 단체, 협력 업체들도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자는 정책 제언도 함께 내놓았다. 노동자나 하청 업체들은 기업과 장기적 이해관계를 함께하기 때문에 ‘이해관계자협의회’를 구성해 기업 경영에 대한 자문 기능을 수행하게 하면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는 취지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가 발주한 보고서에서 강도 높은 투자 압박 제언이 나오면서 재계는 차기 대권 주자들의 기업 관련 공약에 귀를 바짝 기울이고 있다. 대기업의 한 대관 담당 임원은 “비단 이재명 후보뿐 아니라 야당의 윤석열·홍준표 후보도 다양한 재정 확대 공약을 펼치고 있는데 나라 곳간에 한계가 있는 만큼 결국 보고서 내용처럼 기업을 대상으로 인건비 인상, 투자 확대 등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규제 일변도 부동산 정책이 실패로 끝난 것처럼 기업을 상대로 채찍을 들기에 앞서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더불어 시장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주주 환원 대책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만 자사주 소각을 금지하는 등 투자 흐름에 역행하는 대책을 내놓을 경우 외국인 투자가들이 이탈하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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