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났음이 분명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억눌렀지만 부글거리는 표정과 부르르 떠는 몸짓이 쳐바르듯 찍은 색과 휘두른 붓질로 드러난다. 어떤 이는 그림에서 치켜 뜬 여인의 눈을, 절규하는 입을, 팔짱 끼고 훽 돌아선 어깨를 봤다고도 말하지만 그림에 구체적인 사람의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인의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에 있다. 어긋난 시대를 살았기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화가 최욱경(1940~1985)의 1966년작 ‘화난 여인’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적 여성화가인 그의 대규모 회고전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내년 2월13일까지 열린다. 작고 2년 뒤인 1987년 같은 곳에서 열린 유작전 이후 34년 만에 국립미술관이 거장을 재조명했다. 다소 늦은 감도 있고, 출품작 규모도 그때보다 적지만 전시 구성의 솜씨나 작가에 대한 접근방식은 알차다. 전시 제목의 ‘앨리스와 고양이’는 최욱경이 1972년 출간한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에 수록된 시 제목이며, 최욱경이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화난 여인’은 작가 자신일지도 모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사회를 향한 여성들의 시대적 분노일 수도 있다.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욱경은 출판업을 하는 부유한 지식인 부모의 지원을 받아 당대 최고 화가인 김기창·박래현 부부, 김흥수 화백 등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해 1971년 서울 신세계화랑에서 선보인 그의 파격적인 추상화는 ‘여성미술가=규수화가’로 여기던 한국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게다가 당시 한국 화단은 훗날 ‘단색화’로 불리게 된 반복적 행위의 단색조 추상화와, 설치·행위예술을 추구한 아방가르드가 꿈틀대던 때다. 어쩌면 최욱경은 정말로 토끼굴에 떨어진 ‘앨리스’의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2년 여 만에 미국으로 다시 간 그는 한국을 오가며 국제적 행보를 펼쳤고, 영남대와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하다 45세로 요절했다.
일찍 세상을 뜬 이중섭, 시대를 앞서 간 나혜석에 버금가는 최욱경의 가치를 전시장에 나온 그림들이 확인시키고 있다. 과감하고 선명한 색채 그 자체로 시선을 압도하는 1977년작 ‘줄타기’는 미술 애호가로 명성 높았던 호암 이병철 회장이 “그림 좋다”면서 직접 구입을 지시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옆에 걸린 1976년작 ‘콜라주 타임’은 이듬해 ‘한국현대미술대전’에 전시된 이후 44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와 주목할 만하다. 이 두 작품 모두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이다.
전시는 작가가 추상표현주의부터 팝아트와 네오 다다에 이르기까지 1960년대의 첨단미술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던 유학기를 시작으로 1970년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업한 전성기 대작, 1979년 이후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경상도 지역의 산과 남해의 섬 등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자연스럽게 펼쳐 보인다. 연대기적 구성이지만 동선이 자유로와 이리저리 오가며 관람할 수 있다.
“나의 작품들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들 중에서 가져다 뜯어 붙인 시간입니다…저의 작품을 보고 느낀 감정을 보시는 분들의 경험 속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1977년 전시 때 했던 작가의 말처럼 최욱경의 추상은 경험과 현실적 소재에서 시작한 것이기에 감상자들이 이런저런 상상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다. 미국의 추상미술이 시간성, 영원성 등 추상 그 자체를 추구했던 것과 차별화 된 지점이기도 하다. 색감과 표현력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최욱경의 색채 미학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환희’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노란 바탕 위에 노니는 꽃잎들 같지만 초록 위에 얹힌 주황, 보랏빛을 뚫고 나온 황토색, 파랑 위에 공존하는 적색과 녹색, 회색을 긁어 드러낸 갈색, 분홍과 연두의 포개짐 등이 곱씹는 맛을 준다.
검정과 흰색 만으로, 즉 필획으로만 구성한 ‘흑백 작업’은 별미다. 역동적으로 휘몰아치는 흑백의 선이 꽃이면서도 바람같고, 나뭇가지 같으면서도 가슴 할퀴는 발톱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시장 곳곳에서 작가의 시들을 읽을 수 있다. 최욱경은 그림 제목도 시처럼 붙였는데 ‘한때 당신의 그림자를 사랑했습니다’ ‘나는 딸기 아이스크림만을 좋아합니다’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 등은 로맨틱하면서도 중의적이다.
전시를 마무리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우리는 최욱경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최욱경의 시기별 자화상들을 모아 에필로그를 꾸민 전유신 학예연구사는 “그의 자화상은 전시용 작품이라기보다 그가 시를 쓰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던 것처럼 자화상을 그리던 시기의 자신을 기록하는 수단에 가까웠다”고 소개했다. 전시를 함께 돌아본 강수정 학예연구관은 “그간 ‘요절한 비운의 여성화가’로 인식된 이전의 평가와 달리 동시대 현대미술 및 문학과의 관계를 다각도로 조명해 최욱경의 예술이 어떤 위치를 갖는지 재탐색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욱경은 지난 5월 파리 퐁피두센터의 ‘여성 추상미술가들’ 전시에 소개됐고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순회전시로 이어지는 등 ‘밖에서부터’ 주목받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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