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 공급 부족 현상이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증설 계획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내년 DDR5 D램 등 신규 반도체 생산이 필요한 상황에서 복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램리서치, 네덜란드 ASML 등 세계 주요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반도체 제조사의 장비 수요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내고 있다. 특히 물류 대란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공급망 불안 이슈가 지속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상황이다. 더그 베팅어 램리서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리드타임(납품 기간)이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는 여전히 장비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ASML은 연간 40대가량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세계에서 독점으로 생산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미국 인텔, 대만 TSMC 등 세계적인 반도체 제조사들이 치열한 EUV 시스템 확보전을 벌이는 가운데 물류대란과 각종 부품 공급 마비는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페터르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열린 3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연간 장비 생산능력을 늘리는 작업 중 일부 원자재 부품 부족 현상을 겪어 신규 제품 생산 착수가 늦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베닝크 CEO는 "EUV 시스템 생산 능력 확장으로 납기가 늦지 않게 총력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노종원 SK하이닉스 경영지원 담당은 3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장비 발주를 위한 반도체 장비 업체와의 협상을 예년보다 더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며 “장비 부족을 포함한 각종 불확실성 때문에 경영계획을 두 달 이상 앞당겨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가 장비 리드 타임(장비 발주부터 팹 공급까지 소요되는 시간)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자칫 회사 영업 비밀과 전략이 노출될 수 있고 시황에 따라 투자 계획이 하루 새 크게 변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SK하이닉스의 이번 발표는 현재 반도체 시장에서 핵심 장비 확보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풀이된다.
더 큰 문제는 반도체 장비 부족 현상이 올해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용량·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면서 첨단 제조 장비가 더욱 많이 필요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기술 측면에서 변곡점을 맞는 시기다. 인텔이 내년 2분기 신규 D램 규격 DDR5를 지원하는 신규 중앙처리장치(CPU)를 시장에 본격 공급하기로 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이 수요에 맞춰 본격적으로 관련 메모리 제품 생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오는 2022년부터 전체 D램 시장에서 DDR5 D램 비율이 본격적으로 증가하면서 2023년에는 20%, 2024년에는 37.3%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EUV 기술을 활용해 DDR5 D램을 양산하기 시작한 삼성전자는 내년 평택 3공장(P3)을 중심으로 아직 무르익지 않은 DDR5 D램 시장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대형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P3뿐만 아니라 기존 메모리 라인인 17라인, 평택 1공장과 2공장 D램 공정 라인을 공격적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다수 장비를 변경하거나 채워 넣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정보 저장 장치인 낸드플래시의 경우 삼성전자는 176단 낸드플래시 양산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 신규 장비가 필요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내년 4월부터 P3에 수만 장 규모의 176단 낸드플래시 양산용 장비를 입고할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전자는 176단 낸드플래시에 두 번에 나눠서 공정을 진행한 후 이어 붙이는 ‘더블스택’ 기술을 처음으로 도입한다. 한 번에 공정을 진행하는 ‘싱글스택’ 기술에 비해 공정 수가 늘어나는 만큼 기존보다 더 많은 장비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비 공급 부족 현상 심화는 국내 양대 반도체 제조사에 적잖은 변수가 될 것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업계 관계자는 “내년에도 국내에는 올해와 버금가는 장비·라인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기존보다 까다로운 공정이 필요한 만큼 신규 장비도 더욱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각종 공급망 불안과 함께 격화하는 반도체 패권 전쟁 또한 치열한 장비 확보전을 더욱 뜨겁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최근 국내 업체들은 물론 인텔, TSMC, 미국 메모리 업체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의 대형 팹 투자 선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핵심 반도체 장비 분야는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램리서치, ASML, 일본 도쿄일렉트론(TEL) 등 4개 업체가 전체 시장의 50~60%를 차지하고 있어 향후 수급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일각에서는 반도체 장비뿐만 아니라 반도체 공정의 가장 기초 소재인 웨이퍼 수급에도 조만간 큰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물량 증가, 메모리 반도체 설비 증설로 인해 웨이퍼 물량이 크게 부족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일본 웨이퍼 강자 섬코가 약 2조 4,000억 원을 투자해 12인치 웨이퍼 생산 라인을 증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증설 분량에 대해 5년간 공급계약을 마쳤을 만큼 칩 제조 업체들도 웨이퍼 수급 안정화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측은 “올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상반기 반기보고서 기준으로 웨이퍼는 원재료 비용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며 “공격적 투자가 이뤄지려면 웨이퍼 수급에 대한 위기 요인을 낮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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