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혁파는 우리나라 관료 사회에서 30년 묵은 과제로 통한다. 지난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관료들의 복지부동을 비판하며 행정개혁쇄신위원회를 설치한 뒤 모든 정권이 규제 개혁을 핵심 과제로 뽑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프랑스혁명 때 기요틴(단두대)처럼 규제를 없애겠다”고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덩어리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외쳤다.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봇대’로 상징되는 대못 규제를 뿌리 뽑겠다고 선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규제를 암 덩어리에 비유해가며 “손톱 밑 가시를 빼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붉은 깃발을 치우겠다”고 강조했다. 붉은 깃발은 영국이 19세기 당시 신산업인 자동차로부터 마차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차 속도를 통제한 ‘붉은깃발법’에서 유래한 단어다. 표현이야 어찌 됐든 군사정권 이후 역대 모든 대통령들이 말만 바꿔가며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외친 규제 개혁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서비스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다양한 규제를 혁파하자며 2012년 7월 발의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영리 병원과 원격진료 등 의료 서비스에 대한 진입 규제를 푸는 법안이라며 반발하는 의료계를 설득하지 못했다. 문 대통령도 지난해 “도서 벽지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 원격진료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지원에 나섰지만 이렇다 할 진척은 없다.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에서는 “이 법을 거쳐간 담당 과장만 10명이 넘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거북이처럼 더딘 규제 개혁 속도도 문제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자동차 튜닝 산업이 신성장 산업으로 주목받으면서 각종 규제 완화 방안이 쏟아졌지만 시장에서는 “곁가지 규제만 몇 가지 풀렸을 뿐 도리어 정부 통제만 강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 크다. 실제 2013년 당시 “2020년이 되면 4조 원 규모로 시장이 커질 것”이라던 튜닝 산업에서는 강소기업을 1곳도 배출해내지 못하고 있다.
규제 개혁이 정권마다 ‘도돌이표’처럼 실패를 반복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관료들과 임기 후반부로 갈수록 약해지는 대통령의 권력이 결합해 실패가 구조적으로 예견돼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예컨대 이 전 대통령이 전봇대 규제를 뽑겠다며 출범시킨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의 경우 당시 실세로 통했던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위원장이 초대 위원장을 맡아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를 열면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정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위상이 급격히 쇠퇴해 개혁 추진력이 사실상 상실됐다. 이혁우 배제대 행정학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규제 개혁 평가’ 보고서에서 “대통령이 강한 의지를 갖고 있을 때는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규제개혁기구가 이원화되고 여러 부처가 동시에 규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종국에는 ‘규제 개혁 없는 것이 규제 개혁’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가 됐다”고 지적했다.
사전규제영향평가를 받지 않는 의원입법이 쏟아지는 것도 매년 규제가 더 강화되는 근본적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정부가 내는 법안은 ‘행정규제기본법’에 따른 규제 심사를 받아야 하지만 의원입법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아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한 번 법을 제출하려면 규제영향평가,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등 여러 심사 단계를 거치지만 의원입법은 10인 이상의 의원이 동의하면 발의되고, 제대로 된 심사도 사실상 이뤄지지 않아 견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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