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전략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부 지원 허들을 낮추려는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다. 이른바 ‘반도체특별법’을 통해 심사에만 1년여가 넘게 걸리는 예비타당성조사를 간소화하려 했지만 예산 당국의 반대를 넘지 못했다. 또 산업 기반 시설 비용 지원도 강제 규정에서 재량 규정으로 바뀌었다. 반도체특별법의 양 날개가 꺾이면서 기업을 선제적으로 돕겠다던 특별법의 취지가 무색해졌다.
10일 관계 부처와 국회에 따르면 국가첨단전략산업특별법 내 예타 관련 조항이 대부분 수정될 예정이다. 반도체와 2차전지·백신 등 주요 산업에 대한 지원책을 담고 있는 이 법은 지난 1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통과해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여야 간 의견 차이가 크지 않아 법사위 문턱을 순조롭게 넘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기획재정부의 반대에 발목이 잡혔다.
기재부는 예산 당국이 아닌 별도 주체가 특별법을 통해 예타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현재는 기재부 주도의 재정사업평가위원회가 예타 절차와 대상을 전적으로 규율하지만 법이 통과되면 반도체 등 핵심 산업 관련 사업의 경우 국무총리 산하의 별도 위원회가 예타에 관여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그간에는 예타를 받기에 앞서 기술성 평가부터 우선 받아야 했지만 법이 통과되면 총리 산하 위원회 심사를 거쳐 기술성 평가를 건너뛸 수 있게 된다. 예타 면제 대상을 결정할 때도 위원회가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기재부는 총리 산하 위원회의 개입으로 예타 심의 과정에 혼선이 생길 수 있는 데다 예산 낭비를 방지하기 위한 예타의 기본 목적마저 무력화될 수 있다고 거듭 주장해왔다. 기재부의 강한 반대에 여야는 총리 산하 위원회가 기술성 평가와 예타를 면제하는 데 관여하지 않도록 법을 수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법사위 논의에 관여한 한 인사는 “예타 면제에 대한 권한은 결국 기존대로 예산 당국이 쥐고 가겠다는 얘기”라며 “안도걸 기재부 2차관이 직접 나서 법사위 위원들에게 수정을 지속해 요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 원안에는 총리 산하 위원회의 의결이 있을 경우 산업 기반 시설에 들어가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강제 규정이 담겼지만 기재부 반발에 ‘지원할 수 있다’는 재량 규정으로 수위를 낮추기로 했다.
수정안을 두고 재계는 물론 정부 내에서도 아쉬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별법 안에 예타와 관련된 각종 예외 규정을 두려던 것은 정부 지원이 보다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일종의 ‘패스트 트랙’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재 인력 양성이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첨단 기술 개발 사업은 예타의 첫 관문 격인 기술성 평가를 통과하기도 만만치 않은 데다 심사 과정이 1년을 넘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부처는 사업비를 쪼갠 뒤 예타 심사 기준(총사업비 500억 원 이상)을 피하는 ‘꼼수’까지 동원하는 판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인력 양성 사업처럼 시급하면서도 경제 효과를 뚜렷하게 산출하기 어려운 사업이 적지 않다”면서 “주판알을 튕기면서 사업성을 따지는 사이 산업을 육성할 골든 타임을 놓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른 관계자는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산업에서 앞서가기 위해서는 인력을 충분히 뒷받침해야 한다”면서 “현장에 나가보면 벌써부터 인력난 조짐이 보이는데 정부 지원은 너무 굼뜬 감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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