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이 차량용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전기차·자율주행차 시대를 맞아 수요 급증이 예상되는 자동차 반도체 시장을 장악해 파운드리 주도권을 되찾고 반도체 1위로 다시 올라서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인텔은 지난 17일(현지 시간) ‘인베스터데이 2022’를 열고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부문 내에 자동차 전담 조직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텔은 차량용 반도체 생산에 개방형 중앙 컴퓨팅 플랫폼을 활용하며 자율주행 자회사 모빌아이와 협력할 예정이다. 인텔의 차량용 반도체 파운드리 진출 결정은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포진한 미국과 유럽 자동차 시장을 염두에 둔 결정으로 보인다. PC·서버용 반도체 외 차량용 반도체 시장까지 뛰어들면서 미래 파운드리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지가 깔린 것으로 해석된다. 인텔은 자율주행 기술 자회사 모빌아이 기술은 물론 최근 인수합병(M&A)을 진행한 타워 세미컨덕터 기술까지 활용 가능한 모든 기술을 동원해 이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혀갈 가능성이 크다.
현재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극심한 공급 부족을 겪고 있다. 차량에 탑재되는 반도체 수가 급격히 늘어난 데다 차량용 칩 필수 항목인 ‘안정성’을 고려해 주로 레거시(구형) 공정에서 칩을 생산하면서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물류 마비와 원자재 가격 상승까지 엮이면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자율주행·전기차 기술 발전으로 자동차 안에도 복잡한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고도화된 칩이 필요해지면서 테슬라 등 자동차 업체들도 자체 칩 개발에 뛰어드는 분위기다. 칩 미세화를 구현할 수 있는 첨단 반도체 공정을 필요로 한다.
차량용 반도체 파운드리 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세계 각지의 신규 팹을 활용, 세계 자동차 회사들을 지원하는 ‘구원투수’ 역할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인텔은 이번 인베스터데이 행사에서는 내년 하반기부터 반도체 공정에 도입할 예정인 첨단 3㎚(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인텔 3공정’을 도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 M&A를 진행한 이스라엘 파운드리 기업 타워 세미컨덕터의 기술도 적극 활용한다. 인텔 파운드리 사업 책임자 랜디르 타쿠르 수석 부사장은 차량용 파운드리 진출을 설명하며 타워 세미컨덕터의 전기차 전력 관리 칩 제조 기술이 차량용 파운드리 사업에 녹아들 것으로 예상했다.
향후 인텔 차량용 반도체 제조 설비투자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도 주목된다. 인텔은 지난해 9월 아일랜드 팹 생산 규모 확대와 함께 향후 10년간 110조 원을 들여 유럽 반도체 공장 2기를 신설하기로 한 상태다. 향후에는 유럽 지역의 자동차 회사들이 만족할 만한 차량용 반도체 생산 라인에 집중 투자할 것으로 관측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이번 차량용 반도체 진출의 배경으로 꼽힌다. 차량용 파운드리 진출은 기존의 사업영역과 달라 정부의 지원 없이는 결정하기 힘들다. 그간 인텔이 기술 개발에 역점을 두고 생산해왔던 제품은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네트워크 칩셋 등이다. 이들 제품과 달리 차량용 반도체는 혹한이나 폭염 속에서도 안정적인 주행을 보장해야 하며 탑승자의 생명이 걸린 중요 부품인 만큼 고객사 납품을 위한 인증 기준도 훨씬 까다롭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의 차이를 숙지하고 있는 인텔이 재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가 덜 잡힌 파운드리 사업에서 차량용까지 추가로 하겠다고 나선 것은 정부와의 교감 없이는 힘든 일”이라며 “차량용 반도체는 안정성 검증이 까다로워 실제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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