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기적 금융안정 도모와 안정적 경제성장 기반 조성은 중앙은행의 주요 책무이며 지금과 같은 금융불균형의 지속적 누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2021년 8월 26일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
“무엇보다 선제적인 기준금리 인상을 통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안정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2022년 1월 14일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
한국은행이 ‘버블 파이터’에서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돌아왔습니다. 한은 금통위는 지난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0.50%에서 0.75%로 올릴 때만 해도 코로나19 이후 초저금리로 인한 자산 가격 상승과 부채 증가 등 금융불균형을 우려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올해 1월 금리 인상 때는 물가 상승이 가장 큰 화두가 됐습니다. 금융불균형도 문제이지만 물가 대응이 더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입니다.
이번 2월 금통위에서 한은이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3.1%로 전망한 것은 앞으로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역할에 중점을 두겠다고 공식 선언한 셈입니다. 한은은 물가 전망치를 지난해 11월 전망치(2.0%)에서 1.1%포인트나 올려 잡았는데 이는 2008년 7월(1.5%포인트) 이후 가장 큰 조정 폭입니다. 한은이 3%대 물가를 전망한 것도 지난 2012년 4월(3.2%) 이후 10년 만에 처음입니다.
한은이 물가 전망치를 대폭 끌어올린 것은 지난해 10월부터 3%대 물가 상승률이 4개월째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초부터 국제유가가 배럴당 90달러를 훌쩍 넘은 데다 환율마저 1200원을 돌파해 물가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공급망 차질도 여전한 상태입니다. 이후 방역 단계가 완화될 경우 수요 회복 요인까지 더해지면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오를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한은이 최근 물가 상황이 심각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물가 확산 정도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최근 조사 대상인 외식 품목 39개가 모두 상승세를 보이는데 이 가운데 34개 품목이 3% 이상 올랐습니다. 앞으로도 승용차, 가구 등 내구재 가격 상승도 예상됩니다. 물가 상승 확산지수를 따져본 결과 최근 물가 상황은 지난 2008년이나 2011년 물가 상승기보다 심각하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일부 품목의 물가 상승률이 높게 나타났다면 지금은 그보다 상승률 자체는 낮아도 거의 모든 품목에서 물가가 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말 주춤했던 국제유가가 올해 들어 다시 오름세를 보이면서 수입물가나 생산자물가도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1월 생산자물가는 전월 대비 0.9% 오르면서 한 달 만에 보합에서 상승으로 전환했습니다. 수입물가와 생산자물가는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줍니다. 지난 24일 간담회에서도 이주열 총재는 “짧은 기간 물가 상승 정도가 생각보다 크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며 “근원물가마저 상승 압력이 확대됐고 우크라이나 사태나 글로벌 경기회복으로 국제 유가가 오르면서 물가 전망을 큰 폭으로 상향 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한은이 전망치를 내놓자마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무력 충돌이 본격화됐다는 겁니다. 한은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기가 장기화될 위험을 감안해 성장·물가 등을 전망했는데 실제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반영하진 않았습니다. 여기에 미국 등 서방국가가 러시아 제재에 나서는 등 파급 영향이 확대된다면 물가나 성장에 미칠 영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향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추이에 따라 물가 상승 폭은 더 커지고 경제성장률이 하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이미 글로벌 에너지 공급 불안으로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골드만삭스는 이번 사태로 원유를 비롯한 에너지 가격의 ‘슈퍼 스파이크(대폭등)’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원유 의존도가 큰 산업 구조인 만큼 유가 폭등 직격탄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 총재는 간담회에서도 양국 전면전에 따른 영향을 묻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이 글로벌 원자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은 점을 감안하면 곧바로 원자재 수급 불균형이 나타날 것”이라며 “이는 국내 물가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서방이 경제 제재 수위를 높이면 글로벌 교역 위축이나 국내 생산 수출 영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환석 한은 부총재보도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치닫거나 제재가 강하게 나타난다면 원자재 수급 불균형 심화하고 교역을 위축시키는 요인인 만큼 전망보다 성장은 낮추고 물가를 올리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이렇듯 물가가 지정학적 위험이나 글로벌 공급망 충격 등 대외적 요인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만큼 중앙은행 차원에서 대응하긴 쉽지 않습니다. 기준금리 인상 등 통화정책은 총수요를 조절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은은 기대인플레이션이 제품 가격이나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임금·물가의 악순환(wage-price spiral)’을 막기 위해서라도 금리 인상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본격적으로 나선 한은은 물가를 잡기 위해서라면 경기 위축도 감수하고 금리를 올릴 것으로 보입니다. 한은법상 한은의 최우선 목표는 ‘물가 안정’이지 ‘경제 발전’은 정책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총재는 올해 연말 기준금리 1.75~2.0%를 간접적으로 시사한 상태입니다. 다만 오는 5월 차기 정권이 출범하면 경제 성장이나 각종 공약 실현을 위해 확장 재정에 나설 것으로 보이고, 한은에 국고채 매입을 요구할 가능성도 큽니다. 한은이 이러한 요구에 맞서면서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계획대로 금리 인상에 나설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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