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미국에서 향년 54세로 유명을 달리한 넥슨 창업자 김정주 NXC 이사는 국내 게임업계를 대표하는 1세대 사업가다. 그는 세계 최초의 그래픽 온라인 게임 '바람의나라'를 개발해 게임 산업의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산업’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은둔형 경영자’ ‘괴짜 천재’ 등으로 불리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업계는 당황해 하고 있다.
1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김 창업자는 온라인 게임 시장 초기 자수성가로 게임 회사를 세워 ‘바람의나라’ ‘메이플스토리’ 등 굵직한 게임들을 성공시킨 입지전적의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 석사 시절 당시 전길남 교수 아래서 공부하며 본격적인 게임회사 창업 준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전 교수는 1982년 서울대학교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현 ETRI) 사이에 국내 처음으로 구축한 첫 인터넷 시스템을 주도한 인물이다. 국내에서 막 도입되기 시작한 인터넷을 공부하기에 전 교수의 연구실 만한 환경이 없었고, 김 이사가 이때 함께 공부한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도 큰 자극이 됐다. ‘프로그래머 천재’로 알려진 송 대표는 국내 최초 상용 머드게임인 ‘쥬라기 공원’을 제작했다. 머드게임은 지금의 멀티미디어 기반 게임과 달리 텍스트 명령어를 일일이 입력해 이동하고 퀘스트를 수행하는 온라인 초창기 게임이다.
김 이사와 송 대표는 여러 사람이 머드게임에서 발전된 그래픽 환경 속에서 동시에 게임을 즐길 수 있다면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해 국내 최초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인 ‘바람의나라’ 개발에 나섰다. 한 명 또는 두세 명이 즐기던 고전 그래픽 롤플레잉 게임 방식에서 벗어나 동시에 여러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을 국내 처음으로 만들었다. 일종의 기존 머드게임과 롤플레잉 게임이 결합된 형식이다. 게임 초기에는 동시 접속자가 50명만 넘어도 서버가 멈추는 수준이었지만 1999년 동시접속자 수 12만 명을 돌파, 넥슨 연매출 100억 원 시대를 연 국내 대표 게임이 됐다. 바람의나라를 성공시킨 김 이사는 메이플스토리, 크레이지아케이드, 카트라이더, 마비노기 등 새로 선보인 게임들 역시 잇달아 대성공을 거뒀다. 특히 카트라이더는 당시 PC방 절대 1위였던 스타크래프트를 밀어내고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국민 게임으로 자리 잡았다.
김 이사는 조 단위 자산가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3월 미국 싱크탱크 정책연구소(IPS)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조사 대상이 된 억만장자 한국인 38명 가운데 김 이사는 141억 달러(17조원)를 보유해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는 144위다. 다만 정점을 찍었던 넥슨 주가가 떨어지고 그가 보유한 암호화폐 가치도 하락하며 현재 블룸버그 기준 74억6000만 달러(약 9조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이사는 또 비상한 투자 감각으로 지금의 넥슨을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인 인수합병(M&A)은 현재 넥슨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는 던전앤파이터의 개발사 네오플 인수다. 넥슨은 지난 2008년 네오플을 인수했고, 던전엔파이터 지식재산권(IP)는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며 연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로는 암호화폐 관련 투자에 나서며 주목 받기도 했다. 2017년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코빗을 인수했고 이어 유럽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비트스탬프를 사들이기도 했다.
그에게도 어두운 이면은 있다. 친구였던 진경준 전 검사장 뇌물 사건으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넥슨 비상장 주식과 차량, 여행경비 등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법원은 김 이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직무관련성, 대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은둔형 경영인’으로도 알려진 그는 이 사건 이후 더욱 베일에 가려진 모습을 보였다. 김 창업자는 지난 2018년 자기 재산의 1000억 원 규모를 사회에 환원하고 두 딸에게 경영권을 넘기지 않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 6월 NXC 대표직을 물러나며 사실상 넥슨 경영 전반에 거리를 뒀다. 향후 넥슨의 미래가 될 글로벌 투자 기회 발굴과 고급 인재 영입에 전념하겠다는 것이 대표직 공식적인 사퇴 이유였다. 게임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온라인게임 산업을 만들고 이끌어 온 큰 기둥을 잃은 것 같다”며 “그의 개척정신과 열정은 앞으로 한국 벤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후배 창업자들이 본받을만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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