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 흐름을 민감하게 반영해 ‘닥터 코퍼(Dr. Copper)’라고도 불리는 구리 가격이 심상찮다. 4월까지만 해도 톤당 1만 달러를 웃돌았던 가격이 꾸준히 하락해 지난해 8월 이후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9000달러 아래로 내려앉은 것이다. 미국이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 인상)’을 밟는 등 공격적인 긴축 행보를 보이는 가운데 ‘닥터 코퍼’가 경기 침체의 신호를 보내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21일 한국자원정보서비스에 따르면 20일 기준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구리 선물 3개월물 가격은 톤당 8875달러로 마감해 지난해 8월 19일(8775.5달러) 이후 최저가를 기록했다. 앞서 8일 9692달러로 거래를 마친 후 8거래일 연속 하락세를 보이며 단기간에 8% 이상 급락했다. 종가 기준으로 역사상 최고 수준까지 뛰었던 3월 4일(1만 674달러)과 비교하면 두 달 보름 만에 16.9% 내려앉은 셈이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서 구리 6월물의 가격도 4달러 아래로 추락했다. 지난해 4월 이후 처음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글로벌 경기가 본격적으로 회복하리라는 기대감에 3월 장중 5달러를 넘겼던 구리 최근 월물은 현재 3.94달러까지 내렸다. 구리 가격과 연동된 상장지수펀드(ETF)의 수익률도 초라한데 국내 증시에 상장된 TIGER구리실물 ETF와 KODEX구리선물(H) ETF는 약 3개월간 각각 -14.52%, -20.9% 손실을 봤다.
구리는 주택 건설과 전기·전자, 자동차 등 제조업 각 분야에서 빠짐없이 사용되는 원자재다. 그래서 실물경기가 살아나면 구리 가격이 뛰고 경기가 후퇴하면 가격이 내려 글로벌 경기의 바로미터로도 꼽힌다. 실제 올 들어 글로벌 코로나 감염자 수가 급감하는 등 경기 재개 신호가 강해지는 시점에 맞춰 구리 값은 연일 상승세를 보였고 3~4월까지도 톤당 1만 달러를 줄곧 웃돌았다. 또 세계 구리 수요의 절반을 차지하는 최대 구리 소비국인 중국이 코로나 재유행을 이유로 도시 봉쇄에 나설 때는 가격이 꺾였고 5월 들어 봉쇄 해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 때는 9700달러 선까지 반등했다.
이런 구리 가격이 최근 급락하고 있는 것은 결국 미국의 긴축과 그에 따른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구리뿐 아니라 알루미늄·니켈·아연 등 경기를 가늠하게 하는 대부분의 산업 금속에서 가격 하락 추세가 동일하게 관찰되고 있다는 점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실제 구리를 포함해 알루미늄과 아연·니켈·납·주석 등 6개의 주요 비철금속 가격을 반영하는 LME의 비철금속지수(LMEX)의 경우 17일 4199.90으로 거래를 마쳐 연중 최저점을 다시 썼다. 전고점인 5505.7(3월 7일)과 비교해 23.7% 빠진 수치다. 이종형 키움증권 연구원은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급등에 따른 급격한 긴축과 글로벌 리세션(침체) 우려에 비철금속 섹터가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며 “구리는 10개월 만에 9000달러대가 붕괴됐고 아연도 3500달러대로 후퇴하며 5개월래 최저치”라고 말했다.
다만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산업 금속 섹터의 중장기적 전망은 밝다는 의견이 아직은 힘을 얻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 산업 금속 소비국인 중국이 강력한 경기 부양 의지를 보이고 있는 점과 중국 경기가 반등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은 긍정적인 요소로 꼽힌다. 황병진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경기 침체가 없는 한 에너지 전환의 가속화와 장기 수요 성장의 기대 속 산업 금속 섹터의 강세 전망은 유효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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