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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주의 전파 '경제학 거목'…'서울 포청천' 정치 역정도

[조순 전 부총리 별세…향년 94세]

조순학파로 정운찬 등 제자 양성

대학생 필독서 '경제학원론' 펴내

한은 총재 등 경제관료의 길 걷다

서울시장 당선·대권 후보 선출도

부총리 당시 비서관이었던 추경호

"韓경제의 큰산…고인 뜻 받들것"

2016년에 열린 한 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조순 전 부총리. 연합뉴스




한국 경제학계의 대부이자 정치계 원로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조 전 부총리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치료를 받던 중 타계했다.

1928년 강릉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과대를 졸업한 뒤 육군통역장교와 육군사관학교 영어교관(1952~1957년)을 지냈다. 이때 제자로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육사 11기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이어 미국으로 유학해 UC버클리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8년 귀국해 서울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이후 20년 동안 ‘조순학파’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조순학파는 남덕우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서강학파’,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 중심의 ‘학현학파’와 더불어 국내 ‘빅3’ 경제학파로 분류된다.

고인은 1988년 육사 교관 시절 제자였던 노 전 대통령의 권유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으며 경제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일주일에 한 번씩 자택이 있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관악산을 넘어 과천 청사로 출근하면서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직원들로부터 ‘산신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당시 고인의 비서관이었다. 추 경제부총리는 이날 “고인은 우리 경제의 큰 산이었다”며 “고인의 뜻을 받들어 대한민국 경제가 정도를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고인은 이후 1992년부터는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나 중앙은행 독립성 문제로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해 제1회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출마 초기에는 박찬종 전 의원에게 밀려 판세가 기울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하얀 눈썹의 대쪽 같은 이미지를 앞세워 ‘서울 포청천’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열세를 뒤집었다. 여의도광장 공원화, 남산터널 혼잡통행료 징수 등이 주요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이후 통합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으나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에 대항해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와 합당해 대선을 완주하지는 못하고 한나라당 총재를 역임했다.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은 고인이 직접 지은 것이다. 학자에서 경제 관료를 거쳐 정치인까지 보폭을 넓힌 고인이지만 2000년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가 평당원으로 돌아간 뒤에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서울대 명예교수,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등을 맡아 우리 사회의 원로로서 쓴소리를 냈다.



경제학자로서 고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케인스 이론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이다. 케인스는 기존 고전 경제학파와 달리 단기적으로 시장경제가 불균형 상태에 놓일 수 있으며 이런 경우 시장 불균형을 유능한 정부가 개입해 고칠 수 있다고 봤다. 가령 경기 불황이 일어날 경우 정부의 적극적 재정지출이 필요하다는 식이다. 경제학자들은 케인스 이론의 창시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사실상 현대 거시경제학을 창시한 것으로 본다. 고인은 ‘J.M. 케인스’라는 책을 직접 펼쳐낼 정도로 케인스 이론의 전문가로 통한다.

그가 1974년 펴낸 ‘경제학원론’은 제대로 된 거시경제학 교과서가 없던 시절 국내 경제학도의 필독서로 꼽혔다. 이 책은 이후 개정을 거치면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전성인 홍익대 교수, 김영식 서울대 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해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공저자들과 이들이 키워낸 제자들이 지금까지도 조순학파로 우리 경제 전반에 영향을 떨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이석준 서울장학재단 이사장(전 국무조정실장),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도 큰 틀에서 조순학파로 분류된다.

조순학파는 ‘선(先) 성장 후(後) 분배’를 강조한 서강학파나 문재인 정부 시절 ‘소득 주도 성장’처럼 분배에 역점을 둔 학현학파와 비교하면 중도적 성향으로 평가 받는다. 기본적으로는 경제 주체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유주의 성향을 근간에 두되 분배 개선을 위한 성장 전략 도출에 더 큰 관심을 쏟은 일종의 학맥(學脈)에 가깝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설명이다.

윤 의원은 “코로나19 직전인 2020년 초까지도 한국 경제와 관련해 보고서를 쓰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며 “지금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자유 시장경제를 밑바탕에 깔고 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가 적극 나서 대처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위기 관리형 정부’가 되라고 강조하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도 “고인은 정치적 이념과 관계없이 거시경제학의 베이직(기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셨다”며 “케인지언으로서 한국 경제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라고 추모했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부인 김남희(92) 씨와 장남 기송, 준, 건, 승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5일, 장지는 강릉 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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