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학계의 대부이자 정치계 원로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23일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빈소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한덕수 국무총리,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등 여권 인사들이 추모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윤 대통령은 “조 전 부총리는 학자로서, 공직자로서, 정치인으로서 우리나라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야권 인사들은 대부분 빈소를 직접 찾는 대신 간접적으로 추모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박홍근 원내대표가 조화를 보냈고 이광재·이용우 의원은 조기를 보냈습니다.
이 같은 조문 방식의 차이에 대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고인이 생전에 남긴 메시지를 음미해보라”고 귀띔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1928년 강릉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과대를 졸업한 뒤 육군통역장교와 육군사관학교 영어교관(1952~1957년)을 지냈습니다. 이때 제자로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육사 11기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입니다. 이어 미국으로 유학해 UC버클리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8년 귀국해 서울대 교수로 강단에 섰습니다.
이후 20년 동안 ‘조순학파’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조순학파는 남덕우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서강학파’,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 중심의 ‘학현학파’와 더불어 국내 ‘빅3’ 경제학파로 분류됩니다.
조순학파는 ‘선(先) 성장 후(後) 분배’를 강조한 서강학파나 문재인 정부 시절 ‘소득 주도 성장’처럼 분배에 역점을 둔 학현학파와 비교하면 중도적 성향으로 평가 받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경제 주체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유주의 성향을 근간에 두되 분배 개선을 위한 성장 전략 도출에 더 큰 관심을 쏟은 일종의 학맥(學脈)에 가깝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설명입니다.
‘자유와 성장’, 어디선가 들어본 말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윤 대통령이 내세우는 경제 정책의 기본 가치가 사실상 조순 학파의 맞닿아 있는 셈입니다.
경제 관료들의 면면을 보면 이 사실은 더 확실해집니다. 고인이 1974년 펴낸 ‘경제학원론’은 제대로 된 거시경제학 교과서가 없던 시절 국내 경제학도의 필독서로 꼽히는데요. 이 책은 이후 개정을 거치면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전성인 홍익대 교수, 김영식 서울대 교수가 공저자로 참여해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공저자들과 이들이 키워낸 제자들이 지금까지도 조순학파로 우리 경제 전반에 영향을 떨치고 있는데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이석준 서울장학재단 이사장(전 국무조정실장),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도 큰 틀에서 조순학파로 분류됩니다. 우리경제 컨트롤 타워인 기재부를 이끌고 있는 추 부총리는 과거 고인이 1988년 경제기획원 부총리였을 때 비서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권 인사들이 고인의 빈소를 직접 찾아 추모한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경제학자로서 고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케인스 이론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입니다. 케인스는 기존 고전 경제학파와 달리 단기적으로 시장경제가 불균형 상태에 놓일 수 있으며 이런 경우 시장 불균형을 ‘유능한 정부’가 개입해 고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가령 경기 불황이 일어날 경우 정부의 적극적 재정지출이 필요하다는 식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케인스 이론의 창시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사실상 현대 거시경제학을 창시한 것으로 봅니다. 고인은 ‘J.M. 케인스’라는 책을 직접 펼쳐낼 정도로 케인스 이론의 전문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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