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제지 업체 A사는 올해 집행하려던 투자 방침을 전면 보류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당초 올해부터 3년간 신규 설비를 들여 회사의 덩치를 키우기로 하고 본사 인근에 대규모 부지까지 확보해둔 상태였지만 수입 원자재와 전기·가스 가격 급등, 금리 인상까지 겹치면서 투자 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회사 관계자는 “지금 같은 상황이 당분간 계속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며 “투자를 줄이고 대신 최대한 원가를 절감하는 방향으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영지표가 악화 일로로 치닫는 글로벌 경제 환경 때문이다. 인플레이션과 고금리의 영향으로 가계 실질소득이 줄면서 제품을 구입할 수요가 크게 줄었고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제조 비용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들도 고금리·고환율 등 자금 조달 비용이 커지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미국 등 해외투자 재검토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환율 올라 투자 비용 2조 증가…삼성·현대차도 ‘고민’=국내 10대 그룹은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과 함께 1055조 원에 달하는 향후 5년간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 450조 원, 현대차 63조 원, SK 247조 원, LG 106조 원, 롯데 37조 원 등 ‘통 큰’ 투자를 약속했다.
하지만 최근 완전히 달라진 글로벌 경제 상황으로 모든 계획을 원점부터 다시 세워야 할 형편이 됐다. LG에너지솔루션이 1조 7000억 원 규모의 미국 투자 계획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고 SK그룹도 투자 시기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반응이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삼성전자와 조지아주 서배너에 55억 달러 투자 계획을 세운 현대차는 아직 계획대로 투자를 이어가는 중이지만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경우 원·달러 환율이 크게 오르면서 연초 대비 투자 비용이 2조 원가량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해도 계획 대비 비용 증가 속도가 더욱 가팔라지면 투자 규모나 시기 등의 조정이 뒤따를 수 있다.
실제로 기업들의 각종 경영 환경은 악화할 대로 악화한 상태다. 원·달러 환율은 1320원대까지 치솟았고 한국은행의 ‘빅스텝(0.5%포인트 금리 인상)’으로 기준금리는 2.25%로 치솟았다. 통상 환율 상승은 수출량 증대로 이어져 수출 기업에는 호재지만 최근의 환율 상승은 경기 침체와 맞물려 있어 수출 증가로 이어지기 어렵고 원자재 구매 비용 및 해외투자 비용 상승이라는 악영향만 미친다는 점이 문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향후 경기가) 침체 국면으로 흐를 것 같고 내년에도 그렇게 될 것 같다”며 “투자를 안 할 계획은 없지만 투자 지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롯데그룹은 14일 부산에서 신동빈 회장 주재로 첫 사장단회의를 열고 고금리·고물가·고환율 속에서 투자 계획 추진 현황을 면밀히 검토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투자가 진행 중인 상황도 있고 정무적인 문제도 연결돼 있는 만큼 주요 기업들이 발표한 투자 계획을 당장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그렇다고 더 이상 손해를 감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시기가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래 먹거리는 사치…벤처 ‘투자 빙하기’로=대기업보다 경영 환경 변화에 취약한 중소기업은 위기가 더욱 심각하다. 중소기업을 비롯해 벤처 스타트업은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 급등에 이어 고환율,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까지 덮치면서 ‘투자 빙하기’에 이미 들어섰다.
원자재를 장기 계약해 미리 사놓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 대부분은 최근 원자재 값 급등에 따른 손실을 그대로 떠안고 있다. 당장 눈앞의 위기를 헤쳐나가기에 급급하다 보니 미래를 위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난 2년 동안 유동성 자금이 몰렸던 스타트업계 분위기는 더욱 얼어붙었다. 정보기술(IT) 관련 스타트업 B사의 경우 투자 심사가 완료돼 입금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잠정 보류한다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B사는 벤처캐피털(VC) 2곳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했지만 지주사가 2분기부터 투자를 보류하기로 결정해 투자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매출뿐 아니라 영업이익을 내기 어려운 초기 스타트업들은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며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 성장 가능성이 있는 스타트업이 싹을 틔워보지도 못하고 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식품 업계도 원자재 값 폭등에 고환율 악재까지 겹치면서 이중고를 겪고 있다. 국내 굴지 식품 기업인 C사는 원·달러 환율이 10% 오르면 분기 영업이익이 300억 원가량 손해가 난다고 자체 분석하고 향후 경영 계획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식품 업계 관계자는 “내수 비중이 높은 식품 업체는 치솟는 원·달러 환율이 가장 큰 문제”라며 “환율 문제에 대응하느라 비건(vegan) 식품, 케어푸드 개발 등 미래 먹거리 투자는 잠시 뒤로 미뤄야 할 상황”이라고 전했다.
식품 업계는 비싼 달러에 대응해 유럽이나 일본에서 원자재 등을 수입할 때 일부는 달러가 아닌 유로화나 엔화로 거래하는 등 차선책을 살피고 있다. 일부 식품 기업은 통화 선도 파생상품 계약 등을 체결해 환 헤지(대비책)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고환율이 지속되면 환 헤지 비용이 불어나 결국 실적 악화로 이어질 수 있어 고민이다. 한 식품 기업은 올 1분기 환 헤지 관련 비용으로만 직전 분기 대비 34%가량 더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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