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의 한국 방문에서 가장 큰 관심은 단연 외환시장의 안정화 방안과 관련한 양국 합의가 있을지 여부였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326원까지 치솟는 등 외환시장이 롤러코스터를 탔던 만큼 우리 정부로서는 이번 옐런 방한을 계기로 시장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줄 필요성이 컸다.
기대감도 있었다. 이미 옐런 장관은 방한 직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가 열린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안면을 트고 약식 회담도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한국에 들러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재정·통화 당국 수장과 또 만나는 만큼 우리 정부가 원하는 ‘특별한’ 선물을 줄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옐런 장관이 이날 추 경제부총리와의 재무장관 회담을 통해 “한미 양국이 필요시 유동성 공급 장치 등 다양한 협력 방안을 실행할 여력이 있다”는 데 인식을 공유했다고 밝힌 것은 외환시장의 숨통을 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위기 국면에서 달러를 지원할 수 있다고 한 것이라 통화 스와프에 준하는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통화 스와프는 재무부가 아닌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업무고 지금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도 안정적인 만큼 직접적으로 통화 스와프를 건드리기보다는 이와 관련한 우회적 언급을 통해 외환시장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재무장관 회담에 앞서 옐런 장관을 만난 윤 대통령이 “경제 안보 동맹의 강화 측면에서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다양한 방식의 실질적 협력 방안을 깊이 있게 논의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이날 옐런 장관과의 접견에서 양국의 상대적 통화 가치가 안정될 수 있도록 미국도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번 만남을 순차적으로 복기해 보면 결국 옐런 장관이 윤 대통령의 당부에 재무장관 회담을 통해 답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유동성 공급이 의미하는 범주 안에는 당연히 통화 스와프도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라며 “미국이 우리 측 입장을 굉장히 배려해 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미 연준의 상설 통화 스와프 상대가 영국·일본·스위스·캐나다·유로존 등 기축통화국이고 특정 국가와 단독으로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적도 없다는 점에서 이번 합의 자체가 파격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외환시장의 한 딜러는 “미국이 단순 립 서비스가 아니라 보다 더 구체적인 선물을 준 거 같다”며 “투기적 환율 변동성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정부의 한 당국자도 “미국이 우리를 핵심 동맹으로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조치가 아니겠느냐”며 “우리의 외화 유동성 상황은 과거 위기와 달리 여전히 안정적이지만 이번 조치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우리 정부로서는 원하는 것을 얻은 만큼 반대급부로 미국에 내줘야 할 것에 대한 고민도 커질 수 있다. 가령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와 반도체 공급망 동맹(칩4) 가입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 옐런 장관은 이날 LG 방문 일정에서 중국에 대한 경계감을 드러냈다. 그는 “중국과 같은 독단적 국가들이 특정 제품과 물질에 대해 독단적으로 지배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을 막고자 한다”고 말했다. 옐런 장관은 그러면서 “미국 혼자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며 “한국과 같은 책임감 있는 동맹들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두 달 전 방한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을 언급하지 않은 채 “가치관을 공유하는 국가끼리 협력해야 한다”며 에둘러 말한 것보다 미국의 요구는 더 직설적이고 강경해졌다. 옐런 장관은 이날 윤 대통령과 추 부총리에게도 미국의 구상에 동참해줄 것을 거듭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과 옐런 장관의 접견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극복, 전 세계적 긴축에 따른 저소득·취약 계층 지원 등 정책 분야의 공감대가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윤 대통령은 과거 미국 정부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규제 완화와 감세 등 민간 활력을 제고하는 정책을 폈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대북 관련 제재 논의는 없었다고 대통령실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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