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는 국제유가, 곡물가 급등 등 해외발 요인으로 인한 높은 물가상승세로 민생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통화 긴축 등으로 경기둔화 우려가 확대되는 복합 경제위기 상황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첫 세제 개편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녹록지 않은 경제 상황을 언급하며 무겁게 입을 뗐습니다. 추 부총리는 최근의 경기 둔화를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대외 변수 탓만으로 돌리기도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인구 고령화, 낮은 노동 생산성 같은 우리 경제의 고질병이 깊어 외부 요인이 극적으로 해소되더라도 저성장 추세를 돌리기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추 부총리는 “최근의 경제 어려움은 해외발 요인과 누적된 근본적 문제들이 중첩된 데 따른 것”이라면서 “경제의 어려움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토로했습니다.
‘부자 감세’ 논란에도 정부가 21일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등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내놓은 데는 이 같은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조세 부담을 과감하게 줄여 민간의 투자 의욕을 제고하고 침체한 잠재성장률을 함께 끌어올리겠다는 의도입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법인세 평균 실효세율이 1%포인트 내려가면 투자율은 0.2%포인트 증가합니다. 특히 투자와 고용 여력이 큰 기업 중심으로 세 부담을 줄여야 감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정부는 보고 있습니다.
한 켠에는 정부 주도의 경제 운용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난 정부 내 재정 사업이 확대되면서 정부 곳간 사정이 악화한 터라 재정에 기댄 경기 부양책을 펴기 어렵습니다. 국가 채무는 2016년 626조 9000억 원에서 지난해 965조 3000억 원으로 불과 5년 새 340조 원 가까이 늘었습니다. 글로벌 금리 인상 흐름과 치솟는 물가를 감안하면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 부양책도 꺼낼 수 없습니다. 경제 위기 속 재정과 통화정책이라는 ‘원투 펀치’가 묶인 정부로서는 민간 기업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법인세 인하는 정부가 기업의 기를 살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입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전 같으면 공공기관을 동원해 우회적으로 지출을 늘릴 수 있었겠지만 공기업 부채가 심각한 상황이어서 이마저도 쉽지 않다”면서 “민간의 활력을 살려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세법 개정 내용을 좀더 살펴보죠. 개정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정부는 우선 이전 정부에서 25%로 올렸던 법인세 최고 세율을 22%로 낮추기로 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1.2%)을 크게 웃도는 법인세율이 국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을 감안했습니다. 삼성전자가 최대 경쟁자인 대만 TSMC보다 두 배 넘는 세 부담을 지고 경쟁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바로잡겠다는 겁니다.
정부는 이번 개정으로 감면되는 세금을 6조 5000억 원으로 추산합니다. 지난해 전체 법인 세수의 10% 이상을 깎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중 대기업의 세 감면 규모만 4조 1000억 원에 달하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삼성전자만 떼어내보면 세 부담은 1조 5916억 원(케이프투자증권 분석 보고서) 줄어들 것으로 추산됩니다.
정부는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4단계 과표 구간도 2~3구간으로 간소화하기로 했습니다. 세율 구조가 단순해야 기업들의 비용·이익 예측 가능성이 커지고 투자가 더 늘 수 있다고 정부는 판단했습니다. 실제 OECD 37개국 중 35개국이 단일 세율 또는 2단계 세율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현재 과세 표준에 따라 10%·20%·22%·25%로 구성된 과표 구간은 10%·20%·22%로 전환된다. 다만 10% 이하 구간의 과표는 중소·중견기업만을 대상으로 적용한다. 요컨대 대기업은 20%·22%의 2개 구간, 중소·중견기업은 10%·20%·22%의 3개 구간으로 과표가 달리 적용되는 것입니다.
정부는 중소·중견기업에 대해 과세표준 5억 원까지 10%의 세율을 특례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개정 전 과세표준은 2억 원입니다. 중소·중견기업의 세 부담을 일부 줄여 ‘부자 감세’ 비판을 희석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경제 단체장은 “최소한 OECD 수준으로 세제를 손봐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는데 딱 그 정도 선에서 개편이 이뤄졌다”면서 “최고 세율을 더 낮추면 야당의 ‘대기업 특혜’ 프레임에 발목 잡혀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할까 우려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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