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정책대출의 66%를 은행이 정부 대신 공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폭발적으로 불어난 정책대출 수요를 나랏돈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진 정부가 은행 자금을 끌어오면서 금융권 부담을 키우고 있다.
12일 서울경제신문이 입수한 국토교통부 정책대출 집행 현황 자료에 따르면 은행 재원으로 공급한 정책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94조 4800억 원으로 전체 정책대출의 66%를 차지했다. 은행 재원 정책대출 비중은 2022년까지만 하더라도 40%가 채 안 됐으나 불과 2년 사이 20%포인트 넘게 뛸 정도로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 기금을 재원으로 한 정책대출 잔액은 연간 40조 원대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은행 재원 정책대출은 그사이 3배 넘게 불어난 영향이다.
정책대출은 디딤돌·버팀목 대출 등 무주택 실수요자를 대상으로 한 저금리 대출 상품이다. 원칙적으로 정부의 주택도시기금을 통해 공급하되 기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만 은행이 정부를 대신해 대출을 취급한다.
문제는 지난 2년여 동안 정책대출 수요가 이례적으로 급증하면서 기금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자 은행이 떠안은 몫이 이례적으로 커졌다는 점이다. 정책대출은 고객이 일정 소득 요건만 맞추면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설계돼 수요를 적정 수준으로 관리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은행 재원으로 나가는 대출이 늘수록 은행 손실이 누적된다는 것이다. 은행이 정책대출을 취급하면 정부는 시중금리와 정책상품 간 금리 차이를 감안해 6개월마다 손실을 일부 메워준다. 다만 금리 차이를 최대 0.99%까지만 인정해 손실 전액은 보전하지 않는다. 지난해 시중은행 자체 주택담보대출 상품과 디딤돌 대출 금리 차가 1~2%포인트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은행들이 1%포인트 이상의 이자비용을 감내한 것으로 추산된다.
정책대출은 최대 30년 만기의 장기로 이뤄지는데 이차보전은 단기로 이뤄지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자금의 ‘미스매치(기간 불일치)’로 금리가 급변하는 경우 은행의 건전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이 100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수익을 내지 못하는 정책상품에 묶어두면서 발생하는 기회비용도 무시하기 어렵다. 시중은행 여신 담당 임원은 “정책대출이 워낙 저리로 공급되다 보니 고객들이 가능한 늦게 상환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이에 금융 당국 내에서도 정책대출 증가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1월 임원회의에서 “국내 은행의 자체 재원 정책대출이 2022년 이후 180.8% 증가하는 등 가계대출 내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은행의 기회비용 등을 감안할 때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건전성 악화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은행 재원으로 정책대출을 공급하면 당장 재정 부담은 피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재정 누수를 더 키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정부가 올해 예산안에 반영한 정책대출 이차보전 비용은 1조 8398억 원에 달한다. 전년보다 31.9%나 불어난 규모다. 공급 규모를 과감하게 조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30년간 매해 수조 원을 나랏돈으로 메워야 한다는 계산이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은행 재원으로 나간 대출이 늘고 있는 만큼 이차보전 비용은 해가 갈수록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면서 “정책 상품이 본연의 역할을 하면서도 재정이나 경제 활력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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