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서명하며 한국산 전기차가 모두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됐다. 미국 시장 확대를 추진하던 국내 완성차 제조사의 계획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미국 완성차 제조사와 합작법인을 설립한 만큼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지만 중국산 원재료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16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며 이날부터 북미에서 조립되는 전기차만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일정 요건을 갖춘 전기차에 한해 신차는 최대 7500달러(약 983만 원), 중고차는 최대 4000달러(약 524만 원)의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혜택을 받으려면 북미에서 차량을 조립해야 하고 내년 1월부터는 일정 비율 이상 미국 등에서 생산한 배터리와 핵심 광물을 사용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사실상 미국이 전기차와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을 제외하기 위해 도입한 법안이지만 한국에서 생산되는 차량도 덩달아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됐다.
한국 제조사는 대부분 국내에서 만든 전기차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판매 중인 현대차(005380) 아이오닉 5, 코나EV, 기아(000270) EV6, 니로EV, 제네시스 GV60 등은 모두 한국에서 생산된다. 올해 12월부터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생산할 예정인 제네시스 GV70 전기차를 제외하면 아이오닉 5와 EV6 등 주력 모델들이 현지 시장에서 당분간 세제 혜택 없이 경쟁해야 하는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조지아주에 신규 전기차 전용 공장을 설립할 예정이지만 이 공장은 2025년 상반기에나 본격 가동되기 때문에 보조금 수혜에 2년 안팎의 공백이 불가피하다. 주요 전기차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만큼 현대차·기아는 향후 미국 공장에 전기차 생산라인을 추가하는 등 현지 생산과 출시 전략에 변화를 줄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완성차 업계는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를 통해 미국 의회에 의견서를 보내는 등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KAMA는 의견서에서 “한국산 제품과 미국산 제품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한미 FTA에 따라 한국에서 제조 또는 조립한 부품을 사용한 배터리를 탑재한 한국산 전기차에도 세제 혜택을 적용해야 한다”며 “한국은 미국산 수입 전기차에도 보조급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SK온·삼성SDI(006400) 등 한국 배터리 셀 기업들의 북미 시장 내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전기차 보조금 정책의 수혜를 입은 현지 3대 완성차 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포드·스텔란티스와 각자 합작법인을 세우며 ‘동맹’ 관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LG엔솔은 미국 최대 완성차 업체인 GM과의 협업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양 사가 세운 배터리 합작법인 ‘얼티엄셀즈’의 1공장은 조만간 가동을 앞두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 로즈타운에 있으며 연간 생산 규모는 40GWh다. 양 사는 오하이오주 외에도 테네시주(45GWh), 미시간주 랜싱(50GWh)에 각각 2·3공장을 짓고 있다. 또한 스텔란티스와의 합작 투자를 통해 캐나다에도 배터리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LG엔솔은 2025년 이후 북미에서만 200GWh 이상의 대규모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는 1회 충전시 500㎞ 이상 주행이 가능한 고성능 순수 전기차를 250만 대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SK온은 포드와의 합작법인 블루오벌SK를 통해 미 테네시주와 켄터키주에 총 129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 3곳을 짓고 2025년부터 순차적으로 가동할 예정이다. 조지아주에 위치한 공장까지 합하면 북미 시장 연 생산능력이 수년 후 150GWh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SDI와 스텔란티스도 인디애나주에 배터리 합작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다만 배터리 셀 생산능력 확대 속도에 발맞춰 중국산 소재를 줄여나가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리튬·코발트 등 핵심 원자재 공급망을 중국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배터리 업체의 중국 원재료 의존도는 수산화리튬 83%, 코발트 87%, 망간 99% 수준으로 추산된다. 부품·소재 또한 마찬가지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배터리 필수 소재인 음극재와 양극재의 중국 의존도는 지난해 기준 각각 85.3%, 72.5%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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