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금융시장의 흐름을 좌우하는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한국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7%로 한 달 만에 0.4%포인트나 낮춘 시점은 미국과 중국의 경기 침체 우려가 가시화된 시기와 맞물려 있다. 지난달 말 발표된 미국의 2분기 성장률은 -0.9%로 2개 분기 연속 역성장을 기록해 기술적 경기 침체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 전에는 중국의 2분기 성장률이 0.4%에 그쳤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미국의 성장률을 4.0%에서 2.3%로, 중국의 성장률을 4.8%에서 3.3%로 각각 크게 하향 조정한 것도 이 무렵이다.
글로벌 IB들이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치를 2.4%로 그대로 두면서도 내년 성장률을 크게 낮춘 것은 주요국 성장 둔화로 인한 수출 타격이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화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중(對中) 수출 비중은 25.3%, 대미(對美) 수출 비중은 14.9%로 두 나라를 합치면 40%를 넘는다. 올해 상반기 경기가 선방했지만 하반기부터 경기가 꺾여 내년에는 잠재성장률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본격적인 침체가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한 셈이다.
실제로 수출 둔화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6월 통관 수출 기준 대중 수출이 전년 동월 대비 0.8% 감소했다. 대미 수출 증가율은 5월 29.2%에서 6월 12.2%로 급감했다. 주력 품목인 반도체 수출 증가율마저 5월 14.9%, 6월 10.7%, 7월 2.1%로 가파르게 떨어지더니 이달에는 -5.1%(10일 기준)로 전년 동기 대비 감소 전환했다. 연간 누적 무역수지 적자도 229억 3000만 달러로 불어났다. 이대로면 올해 무역적자 규모는 역대 최악이었던 1996년의 206억 달러를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김용균 국회예산정책처 분석관은 “글로벌 경기 침체가 지속될 경우 무역적자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대외 경제 여건 변화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고물가가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감소시키는 점도 문제다.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려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빠르게 올릴 수밖에 없어 가계·기업 모두에 부담이 된다. 한은의 모형 분석에 따르면 기준금리 1.75%포인트를 올렸을 때 성장률은 최대 0.4%포인트 하락한다. 공급망 차질에 임금 인상, 금리 인상 등이 겹치면서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이 큰 폭으로 늘며 설비·건설 투자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특히 환율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여건에 기름을 붓고 있다. 이날 환율은 1325원 90전으로 거래를 마쳤지만 장중 한때 1328원 80전까지 오르면서 한 달 만에 연고점을 넘어 2009년 4월 29일(1357원 60전) 이후 약 13년 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기 침체 우려에 국제 유가가 소폭 내리면서 물가 상승 압력이 다소 완화됐으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행보에 급등한 원·달러 환율이 이를 상쇄하는 양상이다. 우리나라와 일부 제품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일본이 엔화 가치를 떨어뜨려 원화 가치 하락이 수출 경쟁력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특히 원화에 큰 영향을 주는 위안화도 덩달아 빠지면서 원화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는 분석 또한 나온다.
환율 상승 등으로 고물가가 지속될 경우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 행보도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시장에서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이달 25일 정례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2.50%로 0.25%포인트 올릴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은 조사국이 5월 발표한 올해 성장률(2.7%)과 내년 성장률(2.4%)을 얼마나 낮추고 올해 물가(4.5%)와 내년 물가(2.9%)를 얼마나 올릴지도 관심사다. 한은이 전망한 올해 성장률 2.7%를 달성하려면 남은 3분기와 4분기에 각각 0.3%씩 성장해야 하는데 이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높은 물가 상승세가 계속되는데 성장률이 가파르게 떨어진다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에 진입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박근형 한국은행 과장과 강규호 고려대 교수가 5월 발표한 ‘우리나라 스태그플레이션 발생 확률 추정’ 논문에 따르면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확률은 내년 1분기에 38.4%에 이른 뒤 3분기까지 32.3%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봤다. 강 교수는 “향후 1년에서 1년 반 정도 일시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확률이 정상기에 비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물가 대응을 위해 한국은행이 7월 사상 최초로 50bp(1bp=0.01%포인트) 금리 인상을 단행한 데 이어 향후 상당 기간 긴축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경기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라며 “높은 물가가 이어지는 가운데 긴축정책, 공급망 회복 지연,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경기가 빠르게 둔화한다면 우리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진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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